“어쩌다 보니 엄혹해진 세상”…홍범도와 조지 클루니
영웅의 몰락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때로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영웅을 기리기 위해 만든 동상이 없어질 때다. 옛날 일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너무 길어지니까, 21세기에 있었던 몇가지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2003년 미국은 이라크 전쟁(제2 걸프전)을 개시하고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당시 이라크 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철거되었고, 시민들은 바닥에 떨어진 동상을 모욕하고 질질 끌고 다녔다. 2020년에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이 여파로 제국주의 시대 영웅들이 재평가받고 지위를 박탈당했다. 벨기에에서는 아프리카 콩고를 식민지로 삼고 착취했던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곳곳에서 파괴되었다. 미국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혹은 침략한) 콜럼버스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이전을 앞두고 있다. 흠. 마지막 예시는 뭔가 이질감이 드는데? 그 이유를 알아보자.
논란의 시작은 작년 국정감사였다.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이 2022년 정기국회 국정감사 중에 이런 발언을 했다.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공을 세우긴 했으나, 독립군의 씨를 말린 자유시 참변의 주동자였는데 왜 육사에 흉상을 놔뒀는지 의문이라고. 이 발언을 갖고 육사는 국회 지적 사항이라는 명분으로 흉상 이전을 추진했고, 최근 광복절 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공산주의, 반국가세력 등의 표현을 쓰면서 논란이 커져 지금에 이른 것이다.
현재 잣대로 과거의 인물을 재평가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세종대왕을 비롯한 조선시대 왕들에게 축첩을 일삼은 가부장주의의 화신이었다고 비난을 퍼붓는 일은 정당한가? 아침 시사 프로그램을 연출하던 때 매일 새벽에 출근해 저녁 늦게 퇴근했던 나와 그런 나를 방치한 우리 팀장은 노동 감수성이 제로여서 그랬던 걸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보는 시각과 1990년대, 1970년대의 시각이 같을 리 없다. 하물며 남북한이 분단되기 전의 공산주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였을 거다. 아무리 시대 보정을 해도, 100년 전의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를 지금 잣대로 평가하는 일은 무리다.
더 큰 문제는 홍범도 장군이 정말 공산주의자였고 다른 독립군을 몰살시킨 주범이 맞느냐는 것이다. 역사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소위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건에 대한 기록과 평가도 엇갈린다. 앞에서 동상이 철거된 후세인과 레오폴드 2세, 콜럼버스는 학살과 잔혹 행위에 대해 이견 없는 명백한 책임이 밝혀졌다. 이들의 이름 옆에 홍범도 장군의 이름을 적었을 때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제국주의 영웅들의 동상을 철거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던 2020년 당시 윈스턴 처칠(전 영국 총리)이나 샤를 드골(전 프랑스 대통령)의 동상도 페인트와 낙서를 뒤집어쓰는 수난을 겪었고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과거를 검열하거나 편집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철거 요구를 거부했다. 우리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을 따로 만든 이유도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을 보면서 자꾸 떠오르는 이름은 매카시다. 1950년대 미국에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불러일으킨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 말이다. 그는 이제 마녀사냥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는 매카시즘이라는 단어로 박제되었지만, 당시에는 지식인과 예술인을 포함한 저명인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언론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으면 직장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니까. 그때 용기를 내어 매카시와 한판 붙어보겠다는 언론인이 나타난다. 종군 기자로 이름을 날리다가 시사 프로그램 앵커가 된 에드워드 머로. 무모해 보이는 그의 도전은 성공했을까?
검색만 하면 나오는 역사적 사실을 의문문으로 처리한 이유는 이 칼럼의 목적에 충실하게 영화 음악을 추천하기 위해서다. 배우이자 감독인 조지 클루니가 2005년에 연출하고 직접 출연했던 영화 ‘굿 나잇 앤 굿 럭’. 머로와 매카시의 한판 승부를 실제 기록영상인 양 흑백 화면에 담은 이 영화는 클루니의 연출작 중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작품이다.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양심에 좀 찔리는데, 영화 음악은 널리 추천할 수 있다. ‘아이브 갓 마이 아이스 온 유’ ‘유어 드라이빙 미 크레이지’ 등 여섯곡이 장면에 맞춰 적절하게 흐른다. 특히 영화에도 1950년대 가수로 직접 출연한 재즈 싱어 다이앤 리브스가 피아노 트리오에 색소폰을 얹은 콰르텟 밴드와 녹음한 명곡들은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입문용으로도 딱이다.
영화에서 프로그램을 마칠 때마다 머로가 던지는 맺음말을 슬쩍 바꿔 오늘의 칼럼을 마쳐볼까 한다.
“어쩌다 보니 엄혹해진 세상, 독자님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 행운을 빕니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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