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지진에서 살아 돌아온 일본 유학생[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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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사진은, 100년 전 일본에서 유학하던 도중,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극적으로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온 두 명의 젊은 조선인 사진입니다.
둘째, 일본의 사진기자들은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집단학살 당한 순간을 기록하지도, 입수하지도, 보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현장으로 파견을 갔다는 기록은 없으니 아마 당시 지면에 실린 사진들은 일본 신문에서 찍은 사진을 입수해서 게재한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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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됩니다. 또한, 일본의 자경단원, 경찰, 군인 등이 조선인을 집단 학살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인들 사이에는 ‘조선인들이 자연재해라는 혼란을 틈타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급속하게 퍼졌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사진은, 100년 전 일본에서 유학하던 도중,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극적으로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온 두 명의 젊은 조선인 사진입니다. 9월 7일자 1면 사진입니다. 서울역 근처로 보이는 곳에서 단정한 교복 복장의 두 청년이 어색한 포즈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적사항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9월 7일 구사일생으로 동경을 탈출한 2 학생 – 생지옥의 실황을 목도한 최신 소식. 참화의 지옥을 벗어나 2일에 맹화 중의 동경을 떠나 도보와 무료 승차로 구사 일생의 곤경 중 6일 아침 6시 경성역에 도착하는 급행차로 무사히 귀국한 학생 2명이 있다. 그들은 원적 평남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1320 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은야정 27좌등방 명치대학생 한승인 원적 원산부 두방리 49 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은야정 27 좌등방 동양대학생 이주성 의 양군인데 그들은 지진이 일어날 당시에 가장 위험한 경교구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였으며 화염 중에 몸을 피하여 가진 곤경을 겪곤 돌아왔는데 그들은 조선 사람으로서 처음 귀국한 사람이라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만한 소식이 많기로 그 대강을 보도하는 바이다. |
▶ 이 날 신문에서 한승인 이주성 두 대학생이 직접 목격한 간토대지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단편적이지만 의미있는 증언을 싣고 있습니다. 기사 중에서 자경대와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위협 부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입니다.
“무수한 일본인이 자경대를 조직하고 만일을 예방하는 중 그 보호를 받아서 명치순궁에 숙박하고 3일 아침에 출발하여 철도 뚝을 따라 70리 밖 포화(浦和)에 도착하였다. 경찰서를 방문하고 그 보호를 받아서 조정까지 차표 없이 차를 타고 그로부터 명고옥(名古屋)까지 타고 그 다음 신호(新戶)에 나와 교섭한 결과 하관(下關)으로 급행하였다. 중간에 천구에서 조정까지는 창으로부터 승강하고 열차의 지붕까지 타고 있었다. 기차 기관차와 화차의 지붕까지 전부 타는 중이었다. 이 같이 불 속은 나오는데도 기차연로에서 자경대가 조선사람인 줄을 알면 끌어 내리게 되었으므로 매우 위험하였다 (이하 36행 삭제) |
일본인들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자경대원들은 조선인 유학생이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숙소를 안내하는 역할도 하고, 한편으로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조선인들을 열차 밖으로 강제로 끌어내리기도 했다는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기사 본문에서 (이하 36행 삭제)라는 표현이 기사 끝부분에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문맥상 자경대원들이 조선인에게 가했던 폭력 상황을 묘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만 당시 검열과정에서 삭제되어 있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못한데다 일본 정부 역시 린치와 학살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도 제대로 되지 않아, 한일 관계에는 앙금이 남아있고, 우리나라에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해결방식을 둘러싸고 좌우가 여전히 대립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진을 비롯한 이미지가 정치적 매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데 꽤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본질이 그랬더라도 사진기자일을 하면서 그 말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은 불편부당해야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100년 전 일본의 지진을 보면서 사진이라는 게 정치성을 갖는 매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당시 신문에서는 일본의 피해 상황을 아주 많이 다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의 경우, 9월 3일자 횡설수설 칼럼을 통해 일본 도쿄가 지진으로 전멸했다는 보도를 하고, 9월 3일자 본사 기자 파견과 일본 가족 안부 확인 돕겠다는 사고를 3면에 실었습니다. 9월 7일에는 입수한 사진으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화보 보도’를 하고,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있으니 도쿄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보도를 함께 합니다. 9월 8일에는 항공사진으로 폐허를 보여주고 거리에 즐비한 시체사진도 보도합니다.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면,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자세하게 일본의 재난을 다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둘째, 일본의 사진기자들은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집단학살 당한 순간을 기록하지도, 입수하지도, 보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현장으로 파견을 갔다는 기록은 없으니 아마 당시 지면에 실린 사진들은 일본 신문에서 찍은 사진을 입수해서 게재한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 사진 중에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신문사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에 대한 린치와 학살 모습의 사진은 없습니다. 아마 조선인 사진기자가 현장을 갔었다면 하는 가정을 해봅니다.
셋째, 저는 100년이 지난 생존자 사진을 발견해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인들이 저질렀을 학살에 대해 지금이라도 책임 있는 대책이 있길 바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오늘은 100년 전 간토 대지진 당시 구사일생으로 일본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온 두 명이 유학생 사진에서 사진을 비롯한 기록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관점과 가치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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