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22명·14달…오염수 ‘샅샅이’ 파놓고 왜? [주말엔]
최근 한 보고서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제목이 꽤 길다.
협동연구총서 :「원전 오염수 대응전략 수립을 위한 기초연구」
무슨 내용일까. 긴 제목 그대로다.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해양에 방류했을 때,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다각적으로 검토했다.
연구엔 14달이 걸렸다. 연구는 2021년 7월에 시작됐다. 일본이 해양 방류를 확정한 지 석 달 지난 때였다. 2022년 9월에 끝났다.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해서 윤석열 정부에서 마무리됐다.
연구원 22명이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환경연구원, 한국법제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속 전문 연구자들이다. 국책연구기관 4곳이 힘을 모았던 프로젝트였다.
소요 예산은 2억 원이다. 정부의 통상적인 정책 용역 계약이 수천만 원짜리다. 상당히 큰 연구였음을 말해준다.
적잖은 돈과 시간, 인력이 들어간 연구 끝에 8백 쪽 넘는 보고서가 발간됐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지금 읽을 수 없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열람제한' 표시가 선명하다. 정부가 비공개 결정했기 때문이다. 비공개를 결정한 시점은 지난해 11월이었다.
■ "가장 상세한 보고서"
KBS는 국회 정무위원회 강훈식 의원실의 도움으로 보고서 원문을 확인했다.
보고서는 연구 목적을 '오염수 방류 시 부문별 대응 전략을 상세히 검토하기 위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한 이유가 있었다. 오염수와 관련된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 이슈를 '샅샅이' 다뤘다. 결론으로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전략을 다방면에 걸쳐 제안했다.
그 제안은 <3대 전략, 11대 과제>로 정리했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세부 내용을 모르더라도, 부문별 대책을 상세히 정리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보고서는 오염수 관련 다른 연구들이 어떠했는지도 모두 검토했다. 이 보고서보다 더 상세한 보고서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오염수 관련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상세한 보고서라는 얘기다.
■ 정부도 '실력 인정'
물론 보고서는 보고서일 뿐이다. 정책 연구보고서의 모든 내용이 정책이 될수는 없다. 단 한줄도 실행되지 못하는 정책 연구보고서도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 보고서를 어떻게 취급했을까.
<3대 전략, 11대 과제> 표를 다시 보자. 정부가 현재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정책이 상당수다.
수산물 소비 진작과 오염수에 대한 모니터링 강화는 정부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부가 보고서 내용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방증이다.
보고서에 대한 정부 평가는 비공개 결정 사유에도 녹아있다. 정부는 '보고서가 공개되면 전략이 노출돼 대외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취지로 비공개를 결정했다.
정부 스스로도 보고서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실력을 인정한 셈이다.
연구 계획을 세운 곳이 어딘지를 봐도 정부가 이 보고서에 두는 무게를 알 수 있다.
연구를 발주한 곳은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다. 국책 연구기관 전체를 총괄하는 곳으로, 이사장이 장관급인 조직이다.
연구 주관은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맡았다.
■ "일본에 질 수 있다"
보고서의 여러 제안 중 지금의 정부 정책과 가장 거리가 있는 부분은 국제적 대응에 대한 부분이다.
보고서는 국제협력을 매우 강조하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염수 방류는 전례없는 국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혼자 감당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사안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국제원자력기구, IAEA에 대한 평가다. 보고서는 'IAEA가 일본을 지지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IAEA의 논리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고 제안한다.
대신 한국이 독자적인 연구와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데이터가 곧 힘이기 때문이다. 그걸 바탕으로 국제 협력을 이끌어낼 준비를 해둬야 한다고 주문한다.
일본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에 대한 우려도 담겨 있다. 현재 한국은 일본산 수산물을 일부만 수입금지하고 있다. 후쿠시마를 포함한 8개 현에서 잡힌 수산물에 한해 수입을 막고 있다.
2013년 9월부터 시작돼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조치다. 2015년 일본이 세계무역기구, WTO에 제소했고, 1심에서는 한국이 졌다. 2019년 2심에서 뒤집으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보고서는 일본이 수입금지 조치를 다시 WTO 제소할 경우 '한국이 법적 논리로는 승소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한국의 대비 태세에 여러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연관기사 참조)
[연관 기사] [단독] “일본 수산물 수입 금지, 다시 재판하면 져”…비공개 보고서 입수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68305
실제로 일본 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외국 정부의 수입 규제 조치를 해제하겠다고 자국 어민들에게 공언하고 있다.
■ 전략적 모호성? 의도적 무시?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어보자.
한 원조 맛집이 있다. 손님이 줄을 잇는 '찐 맛집'이다. 비결은 주방장의 '비밀 조리법(레시피)'이다. 사정상 맛집의 주인이 바뀌었다. 주방장은 '비밀 조리법'을 새 주인에게 넘겨 줬다.
새 주인은 보통 어떻게 할까. 당연히 '비밀 조리법'을 공개하지 않는다. 밤을 새워가며 조리법을 익힌 뒤, 자신의 실력을 더해 조리법을 더 발전시키면 될 일이다.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보고서는 가끔 비공개된다. 민감한 정책일 때는 비공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대국이 있는 이슈일 때 더욱 그렇다. 기껏 힘들게 연구한 전략과 전술이 상대국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일어업협정으로 온 나라가 민감했을 때, 당시 일부 연구보고서도 비공개됐다. 비공개 결정 자체를 도 넘게 비난할 이유는 없다.
더 본질은 해당 연구 내용을 정부 내부적으로 제대로 활용하고 있느냐 여부다.
정부는 그렇게 활용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박구연 국무조정실 국무1차장은 "정책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책 결정에 참고하는 수많은 연구 또는 의견의 하나" 라며 "보고서 제안 중 일부자 정책에 반영되지 않은 걸 문제 삼는 건 잘못된 지적"이라고 밝혔다.
연구보고서는 오염수 문제에 대응할 때 국제협력의 중요성에 무게를 뒀다.
국제해사기구,국제사법재판소,국제해양법재판소,유엔해양법협약,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등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을 검토했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정부에 제안했다.
그중 하나인 국제해사기구 총회가 다음 달 2일부터 영국 런던에서 열린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오염수 방류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국제사회 여론을 살필 수 있는 자리다.
우리 정부는 이 자리에서 어떤 입장을 전개할까. 언론의 질문이 거듭됐지만, 정부는 구체적인 전략을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모호한 설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상대국에 전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전략적 모호성일까. 아니면, 국제협력을 강조한 제안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일까. (연관기사 참조)
[연관 기사] 한 달 뒤 ‘IMO 총회’ 원전 오염수 다루나…정부는 ‘신중’ 기조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6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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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범 기자 (jbkim@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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