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의 발칙한 상상...세상 발칵 뒤집은 20세기 최고 ‘문제작’ [나쁜 책]
[금서기행, 나쁜 책-9] 주제 사라마구 ‘예수복음’
※아래 기사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교인이 읽기에 불편한 신성모독적 표현이 다수 서술되어 있습니다. 불쾌감을 느끼실 수 있음을 미리 고지하오니 원치 않는 경우 부디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시기 바랍니다.
작가 사라마구는 인간과 세계의 모순을 풍자적인 상상력으로 꼬집은 거장입니다.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논란이 컸던 소설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닙니다. 1991년 발표된 ‘예수복음’입니다.
‘예수복음’은 출간 후 가톨릭계와 개신교계로부터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유럽의 한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의 심사를 거부했고, 당시 포르투갈 총리는 “모욕적”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사라마구와 그의 아내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야 했습니다.
‘예수복음’ 발표 7년 뒤, 사라마구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로마 언론과 바티칸 교황청까지 이를 비판했습니다. ‘예수복음’은 아직도 가톨릭 금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소설일까요.
가령 이런 겁니다. 요셉의 아내 마리아는 베들레헴 간에서 예수를 출산한 뒤 마구간 구유에 예수를 눕혔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지요.
‘예수복음’엔 작가 사라마구의 상상력이 문장마다 한 방울씩 더해집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은 뒤 아버지 요셉은 로마 군인을 위해 목수로 일합니다. 대패질을 하고 들보를 짜맞추지요. 나사렛에 돌아갈 여비조차 부족했던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셉은 로마 군인들의 대화를 엿듣습니다. 로마의 한 장교는 말합니다. “3세 이하의 아이들을 오늘 밤 제3시부터 전부 살육하라는 헤롯왕의 명령이 떨어졌다.”(121쪽)
이후 요셉은 정신분열에 가까운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다른 아기들을 살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예수)만 살렸다는 극도의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한숨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목수(요셉)는 마을 사람들에게 군인들이 아이들을 죽이러 온다고 알릴 수 있었지. 시간이 있었으니까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피신할 수 있었을 거요. 이 죄에는 용서가 없소. 아버지의 죄는 자식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 요셉의 죄의 그림자가 이미 아들(예수)의 이마를 어둡게 덮고 있소.” (133~134쪽)
천사는 마리아에게 무려 ‘죄의 연좌제’를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요셉의 죄가 아들 예수에게 상속되리라는 끔찍한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악몽에 괴로워하던 요셉이 사망하고, 예수는 요셉의 ‘꿈(로마의 군인들이 아기들을 죽이러 가는 악몽)’을 물려받습니다. 예수는, 왜 자꾸 자신이 밤마다 악몽을 꾸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요셉의 꿈에 얽힌 사연을 들려줍니다.
당시 베들레헴에서 헤롯왕의 명령으로 죽은 3세 이하 아기들의 숫자는 25명. 악몽의 이유를 알게 된 예수는 더 큰 죄책감으로 고뇌합니다.
그때, 예수의 나이 14세였습니다. 이후 예수는 광야로 가서 혼자 머무르고 유대교 지도자를 만나 논쟁을 벌이며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과 어울립니다. 그리고 ‘몸 파는 여자’ 막달라 마리아와 연인 관계가 되어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가 오면 너에게 모든 권세와 영광을 줄 테니, 그저 최선을 다해 살고 있으라”는 일종의 명령이자 지시, 혹은 제안이었습니다.
‘예수복음’에 그려진 하나님은 평온과 온화의 신이 아니라 질투하고 경쟁하며 정복하려는 신이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신(神)으로서의’ 탐욕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원대한 계획까지 예수에게 털어놓습니다. 자신은 4000년간 유대인의 유일신이었는데, 아들 예수를 순교시킨 뒤 인류 전체의 신이 되려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의 탄생조차 예수를 순교자로 만들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다’고 하나님은 말합니다.
① ‘내(하나님)가 내 계획 속에서 너(예수)를 위해 예비한 역할을 해낸다면, 향후 육백 년 정도 안에, 우리 앞의 모든 갈등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우리가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로 가톨릭이라고 부르게 될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옮겨가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는 거지. 당신이 당신의 계획에서 저를 위해 예비하신 역할이 무엇인가요. 순교자의 역할이란다, 내 아들아.’(449쪽)
② ‘두 손이 뱃전을 움켜쥐었다. 거대하고 강한 두 손이었고, 손톱도 단단했다. 배가 흔들렸고, 헤엄을 치는 사람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왔다. 이어 몸통이 나오면서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악마)도 함께 이야기하러 왔어. 그가 말하며 뱃전에 앉았다. 예수와 하나님의 딱 중간이었다. 이 친구가 우리가 방금 말하던 악마야. 예수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하나님이 턱수염만 없다면 둘이 쌍둥이로 보일 것임을 알았다.’(445~446쪽)
특히 이 자리에서 악마는, 맡겨진 소임(전 인류의 슬픔과 고통을 유발하는 악행)에 최선을 다할 테니 훗날 자신을 천국에 보내달라고 하나님에게 제안합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끝내 너(악마)를 용서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천국에 머무를 필요도 없다면서 말합니다. 신으로서의 자신이 끝까지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필연적으로 악이 필요하다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였습니다.
③ “자네(악마)가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훨씬 나아.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네가 지금보다 더 나빠졌으면 좋겠어. 내(하나님)가 대표하는 선은 자네가 대표하는 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자네 없이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자네가 끝나면 나도 끝나는 거야, 내가 계속 선이려면 자네가 계속 악이 되는 게 긴요해.”(480쪽)
고난, 죽음, 전쟁, 학살은 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목적을 위해 불가피한 ‘정당한’ 수단이라고 하나님은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즉,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계획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역경과 고난에 빠진 인류가 신을 찾음으로써 위안을 얻는 게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도구화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새 종교의 부흥을 위해선 인간의 고통이 예정되어 있음을 간파한 예수는 하나님의 제안(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인간 재물로 죽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역모’를 스스로 계획합니다. (이 부분은 가장 중요한 장면이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더 자세히 적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에 하나님이 인간들 앞에 등장해 이렇게 ‘선언’을 해버립니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예수는 자신이 “속았다”고 느끼면서 죽어갑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복음’에 등장하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신성모독적 상상력의 전말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포르투갈 총리였던 아니발 카바코 실바는 소설 ‘예수복음’이 아리스테이온상(Aristeion Prize)의 후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합니다. (아리스테이온상은 EU 소속 국가들이 선출한 회원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매년 우승자를 결정하는 최고의 문학상이었습니다. ‘예수복음’은 아리스테이온상 심사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훗날 실바 총리는 포르투갈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실바 대통령은 주제 사라마구 소설의 문학성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2010년 주제 사라마구 장례식에도 불참합니다. 자국의 유일한(현재까지도 유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장례식에 국가 최고 수반인 대통령이 “나는 사라마구를 아는 특권을 누린 적이 없다”고 비꼬며 참석하지 않는,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한편, 1998년 사라마구가 노벨문학상을 결국 수상하자 로마 바티칸 교황청은 사라마구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자 성서의 절대적인 고정관념(예수의 공생애)을 비트는 위험한 시도를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종교가 개방적으로 변화하고 있더라도, 종교 교리 자체를 뒤흔드는 발칙한 상상력까지 수긍할 순 없었겠지요.
그 사이, 주제 사라마구는 카나리아 제도의 란사로테라는 지역으로 이민을 가야 했습니다. 사실상 망명이었지요.
1998년 스웨덴 한림원 보도자료에 기술된 노벨문학상 선정 보도자료를 원문으로 살펴봤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소설에 담긴 상상력, 연민, 아이러니로 뒷받침되는 비유를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현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who with parables sustained by imagination, compassion and irony continually enables us once again to apprehend an elusory reality...).” (1998년 10월 노벨문학상 선정 보도자료)
죄의 굴레 속에서, 인간은 십자가에 매달려 인류의 죄를 대속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죄책감을 실토합니다. 그런데 주제 사라마구는 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인간이 느껴야 하는 원죄의 죄책감을 바로 그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충격적 방식을 사용합니다.
인간의 원죄가 인류의 조상 아담(에덴의 인간)에게서 왔다면,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에서 원죄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나사렛의 인간)에게서 옵니다. ‘원죄를 느끼는 인간’ 대신 ‘원죄를 느끼는 예수’라는 도발적인 상상력입니다.
사라마구는 이윽고 십자가 위의 예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외칩니다.
“인간들이여, 하나님을 용서하라. 하나님은 자신이 한 짓을 알지 못한다.”(549쪽)
이 문장을 표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복음’은 그야말로 최악의 종교 모독 서적일 겁니다.
반면, 이 문장이 인간의 불행에 대한 비명으로 들린다면 ‘예수복음’은 인류 전체를 대표하여 신에게 종교의 모순과 인간 고통의 원인을 묻고자 하는 눈물의 서(書)로 기억될 겁니다.
카인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악인’입니다. 카인은 신이 자신보다 동생 아벨을 더 사랑한다고 믿었기에 동생을 ‘나귀 턱뼈’로 내리쳐 죽입니다. 소설 속 카인은 자신의 살인을 추궁하는 하나님과 논쟁하면서 인간과 신의 ‘공동 책임’을 주장합니다.
“너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악을 택했다”는 하나님의 주장에 소설 주인공 카인은 “주(하나님) 때문에 저지르는 인간 범죄에 대해 주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간의 악행에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신입니다”라고 맞섭니다.
카인의 질문은 유·무신론자를 막론하고 신에 대해 인간이 품었던 의문의 집적이 아닐까요.
신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죄란 무엇인지, 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에서 선악은 어떻게 가려져야 하는지를 고민케 만드는 작품입니다.
‘바람직한 종교란 무엇인가?’
참된 종교는 자기 종교의 완전무결함을 주장하지 않고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종교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종교적 자기비판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종교보다는 교리의 불완전성과 미흡함을 수용하면서 그 자장 속에서 인간을 포용하는 종교가 좋은 종교라고도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인류가 수천 년간 종교의 이름 뒤에서 희생됐던 연민까지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겠지요.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룩합니다. 인간의 고통에의 연민, 그리고 신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는 대신 수행한 것이지요.
성경과 예수를 정면으로 패러디해 사회적 비판을 받았던 작가와 작품은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이 처음은 아닙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이문열 작가의 ‘사람의 아들’도 신약성경 속 예수의 삶을 패러디했고 각각의 크고 작은 논란을 겪었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 등장하는 장 밥티스트 그루누이도 ‘향(香)의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인간들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이교주의적 상상력을 하나씩 감상하고 검토하고 계실 하나님(신)은 과연 저 아래 땅의 인간들이 정성스럽게 빚어내는 불온한 상상력에 분노하고 계실까요.
아니면 그와 반대로, 상실에 슬퍼하고 결핍에 절어 있는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창조주로서 딱한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계실까요.
다만 부디 저는, 그분의 표정이, 후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불현듯 이 시가 생각이 납니다. 잠시 옮겨 적으며 글 맺습니다.
※다음주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1953년 소설 《최후의 유혹》을 다룹니다. 《예수복음》보다 약 40년 앞서 신약성경을 패러디한 소설로 ‘목수 예수는 사실 로마군 십자가 납품업자였다’는 도발적인 상상력을 보인 소설입니다. 이번주 다룬 종교 금서에 이어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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