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피하고 싶을 때 프랑스 귀인이 나타났다 [ESC]
오르막 계속되고 물은 거의 바닥
하산하던 부녀, 기꺼이 식수 보급
몽블랑 봉우리 순례 마지막날
케이블카 타고 10분만에 내려와
우리는 고도 3842m의 에귀유디미디에서 눈앞의 몽블랑 산군을 바라보고 있다. “꼭 30년 전이었어. 23살 때 첫 유럽 여행을 왔거든. 누군가 던진 ‘샤모니 정말 아름답더라’는 한마디에 꽂혀서 샤모니를 찾아왔어.” 혼자 아련한 눈빛의 ‘라떼족’이 되어 올리버에게 30년 전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에귀유디미디에 올랐는데 그날 정전인지 고장인지 정상에서 케이블카가 멈췄다. 매점에 파는 먹거리는 바닥나고, 케이블카는 언제 운행을 재개할지도 모르는 상황. 모두가 피난민처럼 여기저기 모여 앉아 시간을 죽일 때, 내 앞에 한국 남자 둘이 등장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반가워하던 시절이었다. 한 분이 갑자기 배낭에서 버너와 코펠을 꺼냈다. “원래는 안 되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이니까….”라며 물을 끓여 너구리 두 마리를 투하했다. 몽블랑을 눈앞에 두고 먹은 너구리는 내게 ‘인생 라면’이었다. 그날 결국 샤모니 쪽 케이블카는 운행하지 못해 이탈리아 쿠르마유르로 내려와 샤모니로 돌아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늘은 그 루트를 거꾸로 오른 셈이다. 몽블랑의 장엄한 산군을 향한 설렘은 여전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젊은 날 나를 채웠던 저 산을 오르고 싶다는 들끓는 욕망은 사라지고, 지금의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하다는 점이다.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다른 규정’
쿠르마유르 마을로 내려와 루콜라를 듬뿍 얹은 피자 한 판을 다 먹고 4시간 반을 쉬지 않고 걸었다. 오늘의 숙소는 위대한 산악인 월터 보나티의 이름을 딴 보나티 산장. 30대 초반 한창 산악 문학에 심취해있던 시절, 월터 보나티의 이름은 여러 책에 등장했다. 그랑드조라스 북벽 동계초등, 마터호른 단독 동계초등 등 무수한 업적을 이룬 그가 한때 산악 가이드로 일했던 마을이 바로 쿠르마유르. 라인홀트 메스너와 함께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악인이지만, 그는 배신과 모략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케이(K)2 원정대에 막내로 합류했을 때, 팀의 정상 공격조 대원들은 가장 힘이 좋은 그를 따돌리고자 산소통을 예정된 고도보다 더 높은 곳에 갖다 놓게 시켰다. 거기에 더해 체력이 저하된 그와 셰르파가 다다르기 어려운 위치로 캠프를 옮겼다. 보나티와 메흐디는 8100m 고도에서 슬리핑백조차 없이 밤을 꼬박 새우고 살아남았다. 심지어 보나티는 자신이 산소를 소진해 하산시 정상 공격조가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거짓 비난까지 당했다. 그 후 수십 년간 그는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싸워야 했고, 2007년에야 이탈리아 산악 연맹은 보나티의 진술에 기반한 케이2 등반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탈리아 정부가 보나티에게 최고 등급의 공로 훈장을 수여하려 했을 때 공동 수상자에 그를 속인 선배 등반인의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보나티는 훈장을 거부하기도 했다. 35살이라는 나이의 이른 은퇴에는 어쩌면 그런 세상에 대한 환멸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긴 하루를 보내고 그의 이름을 딴 산장에 머물게 되니 먹먹한 마음이 든다. 보나티는 “등산은 도피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간적 나약함에 대한 승리”라고 했는데, 나는 이곳에서 매일 나 자신과 싸워 이기는 중일까. 오늘따라 거센 바람 소리에 흔들리는 유리창 저 너머에는 저마다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저 높은 산을 오르고 있을 이들이 있으리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넘나들며 몽블랑 주변을 한 바퀴 도는 투르뒤몽블랑(TMB) 트레킹 6일째. 이탈리아가 끝나고 스위스가 시작되었다. 티엠비의 즐거움 중 하나는 국경을 자유롭게 넘을 때마다 음식과 언어가 달라지는 일이다. 역시 음식은 이탈리아가 최고. 물가는 당연히 스위스가 ‘넘사벽’. 프랑스는 투르뒤몽블랑 최고의 풍경을 가진 게 아닐까? 걷다 보면 텐트를 지고 다니며 캠핑을 하는 트레커도 종종 만난다. 티엠비 루트에서 야영장이 아닌 곳에서의 불법 야영에 대한 각 나라의 규정도 다 달라서 재미있다. 프랑스가 가장 관용적이다. 저녁 7시 이후 아침 9시 이전이라면 어디에서든 1박에 한해 캠핑이 가능하다. 이탈리아는 2500m 이상에서, 비상 상황일 경우에만 하룻밤 캠핑을 허가한다. 스위스는? 정해진 야영장 이외에서의 캠핑은 무조건 벌금 최소 1000스위스프랑.(약 150만원)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캠핑 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걸어가는 청춘들을 보면 부러움 반, 안도감 반이 뒤섞인다. 서른의 나이에 지리산 종주를 하며 처음 산을 만난 이후 산은 내 삶의 산소호흡기였다. 사무치게 외롭거나 밥벌이의 고단함에 새삼 치일 때,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산에서라면 괜찮았다. 육체의 굴레에 갇혀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며 산을 오르다 보면 신체적인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내 몸의 한계를 스스로 넓혀 가는 과정이 경이로웠다.
‘국경 없는 코골이회’ 밤샘 공격에도…
쉰을 넘기고 나니 산에 오를 때마다 질문이 많아진다. 나는 언제까지 오를 수 있을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 마음껏 걸을 수 있는 날들은 얼마나 남았을까. 산은, 지구는 언제까지 버텨줄까. 기후 위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은 빙하가 더 빠르게 녹고 있고, 몽블랑 산군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길, 위로라도 하듯 야생화들이 하늘거린다. 발 페레 고개를 넘어 능선길에 접어드니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길 위에 색채를 더한다.
연보라색 꽃마리, 노란색 금매화와 기는 뱀무, 자주색 범의귀, 샛노란 노랑벌이와 동이나물, 진보라색 트럼펫 용담, 연분홍 솔채꽃과 진분홍 앵초와 알핀로제, 무리 지어 하얗게 핀 알파인 데이지…. 꽃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산장.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산장 앞 안락의자에 앉아 저무는 몽블랑을 지켜봤다. 바람결에 날아오는 워낭소리가 자욱하게 번져가는 시간이다. 산장에 머물며 이 아름다운 산들이 저물고 깨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 순간을 위해 ‘국경 없는 코골이회’의 중단 없는 밤샘 공격도 견뎌내는 게 아닐까. 다음날 펼쳐질 고생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몽블랑이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며 앉아있었다.
태양 아래 꼬치구이가 되어 지글지글 익어가는 것 같았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녹초가 되었다. 오르막은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배낭의 방석을 꺼낼 여유도 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물통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산행할 때 물을 많이 마시는 체질이 아닌 데다 티엠비는 곳곳에 급수대가 있어서 내가 지닌 물은 500㎖ 물통 하나가 전부였다. 물통의 물은 이제 3분의 1쯤 남았다. 마침 내려오는 부녀가 보였다. 딸은 중학생쯤 되었을까? 아버지는 반바지에 반팔 티, 작은 배낭. 이 동네 주민 분위기였다.
“저, 여기 오르막에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앞으로 3시간 넘게 물 구할 곳은 없는데요. 물 떨어졌어요?” “아니요. 아직은 있는데….” 그가 자신의 배낭을 주섬주섬 풀며 말했다. “그 물 다 마셔요. 어서요.” 나는 남은 물통의 물을 다 마셨다. 물통을 꺼낸 그가 내 물통에 물을 절반쯤 부었다. “더 마셔요. 더는 목이 안 마를 때까지.”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시키는 대로 물을 마저 마셨다. 물통이 다시 비었다. 그가 남은 물을 내 물통 가득 채우며 말했다. “우린 이제 내려가거든요. 근데 어디서 왔어요?” “한국요.” 그가 딸을 마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난 4월에 서울에 2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서 뭐했어요?” “직업이 기자라 취재하러 갔어요.” “그 기사 제목이 뭔데요?” “한국에서의 삶?” “치열한 경쟁에 낮은 행복지수, 뭐 이런 내용인 건가요?” “하하. 맞아요.” “그런 거라면 몇 년 전에 이코노미스트 기자가 책 한 권 썼어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이런 제목으로. 근데 당신 그 기사는 어디서 볼 수 있어요? 르몽드?” 아는 프랑스 신문이 르몽드밖에 없어서 그냥 던진 이름이었다. “하하! 맞아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아, 그거라면 한국에서도 번역판이 나오고 있어요.” “이 기사가 한국판에 실렸을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배낭을 여미고 일어서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가 구글 검색창에서 자신이 쓴 기사를 찾아 알려줬다. “고마워요. 이제 당신은 갈증으로 죽어가던 한국인 한 명을 구했네요.”
그가 준 물 덕분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일어나 비척비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쩌면 두 시간쯤? 수직의 철사다리를 오르느라 끙끙대고 있는데 밑에서 누군가 소리를 쳤다. “당신 물 상황은 어때요?” 누군가 일행에게 외치는 소리려니 싶어 무시했다. 다시 그가 외쳤다. “당신 물 상황은 어떻냐고요?” 아니 이 첩첩산중에서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시끄러워죽겠네. 얼굴이나 좀 볼까? 천천히 뒤를 돌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그가 웃고 있었다. “물 아직 있어요?” “아, 뭐, 네…. 근데 여기서 뭐 해요?” “딸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산행하는 중이죠.”
한 번 하는 것도 힘든데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간다고? 이건 그야말로 헉 소리와 헐 소리가 동시에 나는 일이었다. 과연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혁명 정신의 후예다웠다. 나는 쿡쿡 쑤셔대는 허리 통증에 더위를 먹었는지 몸이 문어처럼 늘어져 그야말로 흐느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누구는 세상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 길을 두 번 오르는구나. 인생은 불공평해.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를 보냈다. 앞서가던 그가 저 멀리서 한 번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흐느적거리며 철사다리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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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투르뒤몽블랑
그날은 6시간을 걷고 완전히 뻗었다. 쓸 수 있는 몸의 모든 기운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내서 쓴 것 같다. 숙소로 와서 씻고, 이른 저녁을 먹은 후에도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고장 난 내 허리를 어루만지며 당부했다. 내일이 마지막이니 조금만 더 버티자!
티엠비 마지막 날. 날은 역시나 청명했지만 오늘도 태양이 문제다. 태양신에게 산 채로 바쳐진 제물이라도 된 것 같으니. 눈이 채 녹지 않아 온몸을 긴장하며 다다른 브레방은 고도 2500m. 이제 고도 1000m의 샤모니까지 내려가는 지루한 하산이 남았다. 나는 아픈 허리를 핑계 삼아 요령을 부렸다. 케이블카로 10분 만에 하산을 해버렸으니. 이로써 ‘내 맘대로 티엠비’가 끝났다. 산장 예약을 제대로 못해 하루에 걷는 거리도 들쭉날쭉, 버스로 하루를 건너뛰기도 해서 정통주의자들 눈에는 차지 않겠지만,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날들이었다. 원 없이 알프스를 뒹굴다 가는 기분이니까. 무엇보다 걷고,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 걷는 단순한 일상이 주는 충만함이 컸다. 이 간결한 삶이 주는 만족감을 서울에서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샤모니로 내려와 열어본 인터넷 세상에는 당장 자동차세와 재산세 고지서, 집 앞에 세워둔 차의 주차 위반 딱지, 자동차 보험 만료 안내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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