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승철 - 저마다 고유한, 서로 닮은 타인들 회화·조각 형식으로 구현 연작 ‘트로피’ 변모 이미지 한 지점에 세운 표지 빗대 배경 초록으로 메워 색의 상징성 강조 3개의 화면 구성 ‘라쇼몬’ 연작 속 인물 눈썹·눈동자 등 변주 따라 감정 달라져 배경에 드리운 색채가 각 표정에 호응
국내 신스팝 밴드 아도이(ADOY)의 앨범 커버 이미지로 그의 작품을 접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낯설지 않은 화면이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이미지’처럼. 유튜브 스트리밍 가운데서나 인스타그램 피드 위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칠 때마다 어김없이 떠올리곤 했던 것 같다. 역시 ‘어디서 본 적 있는 이미지’라고. 그 이미지들은 이른바 유행이 됐다. 옥승철(35)은 말 그대로 유명해졌다.
근대적 사고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이미지’가 작품이 되다니. 옥승철의 이미지들은 오늘의 미디어 환경을 유영하는 작가의 고민을 담은 결과물이기에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한 번 디지털 스크린 위에 놓이면 누구나 손쉽게 원본을 편집하고, 보정하고, 복제 및 배포할 수 있는 시대다. 사용자의 기호와 역량에 따라 복제된 이미지는 자꾸만 원본과 다른 모습으로서 갱신된다. 후보정된 이미지들은 그저 거짓이며 허구일까. 더 이상 그렇게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원본을 변형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그 과정 뒤에 새롭게 태어난 이미지들이 본연과 완전히 다른 정체로서 거듭난다는 사실을 옥승철의 화면들이 증언한다.
옥승철은 중앙대학교 서양화과 학부를 졸업했다. 갤러리 기체(2018, 2020, 2023, 서울)와 아트선재센터(2022,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DMZ: 체크포인트’(DMZ, 파주, 2023)를 비롯해 펑크갤러리(2022, 상하이), 누크갤러리(2022, 서울), 대전시립미술관(2021, 대전), 대구미술관(2019, 대구),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2019, 서울) 등의 기관이 마련한 단체전에 참여했다.
◆오늘날 이미지의 ‘원본성’에 관한 질문
옥승철은 동시대 미디어 환경 속 이미지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좇는다. 재생산된 이미지의 원본성에 대한 질문이다. 온라인 가상현실을 경유하는 이미지는 복제와 변형의 원리로부터 재탄생하고, 왜곡과 편집의 언어를 구사하며,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유통된다. 작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다방면의 이미지를 수집한다. 모은 자료들을 변형 및 가공하여 새로운 장면으로 재구성한 뒤 화폭에 옮겨낸다.
디지털 스크린처럼 매끈한 화면은 엷은 물감을 수차례 덧입혀 올린 세심한 공정의 결과물이다. 요철 하나 없이 반듯한 평면이 폭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연다. 회화의 물성으로 옮긴 가상의 얼굴은 현실의 부피를 지닌 또 다른 실체가 되어 우리의 지금을 응시한다. 사실과 허구를 동시에 품은 캔버스들은 제각기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매 순간 갱신되는 날들 가운데 저마다의 시공을 차지한 각각의 이미지는 오롯이 유일한 원본의 화면이다.
◆트로피: 찰나의 순간, 멈추어 둔 이미지
삼청동 소재 갤러리 기체가 옥승철 개인전 ‘트로피’를 10월 7일까지 연다. 전시는 ‘트로피’(2023) 연작과 ‘라쇼몬’(2023) 연작, ‘얼굴’(2023) 연작 등을 포함하여 회화 16점과 조각 1점, 총 17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중 ‘트로피’는 회화 및 조각의 형식으로 각각 구현된 연작이다. 작가는 ‘트로피’를 온, 오프라인 세상을 오가며 쉼 없이 변모하는 이미지의 한 지점에 세워둔 일종의 표지에 빗대었다. 온라인 게임 지도 위에 남긴 표식이나 인터넷 브라우저의 북마크처럼 말이다. 눈부신 기념품처럼 박제된, 찰나의 이미지가 회화와 조각의 물성으로서 거듭난다.
세 폭의 회화 연작 ‘트로피’의 주위 배경을 크로마키 스크린의 초록이 메운다. 작가는 캔버스의 여백뿐만 아니라 전시 공간의 방 전체를 해당 색채로 도색하여 색이 지닌 상징성을 강조했다. 본연의 맥락에서 도려낸 이미지들은 완전히 다른 맥락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을 가능성을 획득한다. 각각의 트로피가 놓일 장소는 우리의 상상에 따라 현실일 수도, 가상일 수도, 또는 양측 모두일 수도 있다. 좌대 위에 자리 잡은 조각 작품은 매끈한 금박 표면으로 마감된 모습이다. 비로소 삼차원의 부피를 획득한 얼굴의 기념비는 보다 입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매끈한 금빛 피부를 쓰다듬듯, 한 움큼 그 무게를 그러쥐듯 이미지의 감촉을 가늠해 본다.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장소 한편을 차지한 조각의 몸은 전에 없던 뒷모습을 내보인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트로피’의 표정들이 무척 놀란 듯 난색이다. 어느 날의 대화에서 작가는 메두사의 머리에 관해 언급했다. 바라보면 돌처럼 굳어버릴 만큼, 얼굴이란 무엇보다 뚜렷한 상징성을 가진 신체 부위다. 그것이 지닌 유구한 힘은 역사 속 도굴꾼들로 하여금 불상의 머리를 훔치도록, 승전국의 수장으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전시하도록 이끌었다. 어느 찬란한 순간의 전리품처럼, 포획된 얼굴들은 반짝이다 이내 서늘하게 굳어진다. 또 다른 정체, 새로운 존재로서의 이미지들. 최초의 무엇이 되고자 하는 순진한 소망을 미루어둔 채 화면은 같은 이미지의 다른 해석이 만들어 낸 각자의 유일함을 호소한다. 하나의 얼굴 위에 때마다 달리 드리운 색조는 각각의 ‘트로피’로 하여금 독립된 물성이도록, 저마다 서로 닮은 타인이도록 만든다.
◆라쇼몬: 각자의 진실, 여럿의 원본
옥승철이 또 다른 회화 연작 제목으로 삼은 ‘라쇼몬’은 본래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원작 표제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류노스케의 선집 ‘라쇼몬(羅生門) 및 그 밖의 이야기’(1915-1921)에는 ‘라쇼몬’ 외에도 다양한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훗날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몬’과 ‘덤불 속’이라는 제목의 소설 두 편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 ‘라쇼몬’(1951)이 인기를 얻으면서 ‘라쇼몬 효과’라는 신조어가 파생되었다. 동일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입장에서 사실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현상을 가리켜 ‘라쇼몬 효과’라고 한다.
세 개 화면으로 구성된 ‘라쇼몬’ 연작 속 인물은 때마다 상이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일관된 윤곽 내에 자리 잡은 눈썹과 눈동자, 입 모양새의 변주에 따라 얼굴이 드러내는 감정이 달라진다. 높다란 배경에 드리운 색채가 각 표정에 호응한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세 가지 재현은 곧 같은 상황에 관한 각기 다른 판본의 해석들이다. 미상의 인물이 실제로 어떠한 표정을 지었는지는 어느덧 중요하지 않게 된다. 화자의 관점에 따라 진실은 매번 다른 진술로서 탈바꿈한다. 이미지는 그저 그 자체로서 갱신될 따름이다. 화면 안의 얼굴들이 환기하는 것은 보는 이 각자의 잠재의식에 깃든 어떠한 원형이다. 조각난 원본의 유령은 때로 사람이고, 종종 만화책 표지이며, 스치듯 보았던 영화 속 한 장면이다. 모두의 연상에는 적당한 근거가 있다. 마치 라쇼몬 효과처럼.
전시장 내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선마다 눈빛들이 서로를 밀고 당긴다. 가만히 응시하다 곤란한 듯 회피하고, 뚫어질 듯 바라보다 금세 고개 돌려 떠나가는 얼굴들. 저마다의 얼굴이 우리의 기억 속 모호한 원형의 정체를 묻는다. 그 유령은 과연 진짜였던 적 있었느냐고 말이다. 누구나 조금씩 달리 기억하는, 그렇기에 무한한 방식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품은 진실 섞인 허구의 원본이 애초에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갱신되는 실재의 날들 가운데 원본과 복제의 경계는 매번 흐릿해진다. 옥승철은 오늘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이미지들 몇몇에 깃발을 꽂아 둔다. 특정한 순간의 이미지를 여기 유일한 물성으로서 새겨 두는 일이다. 지금의 찬란한 증표로서, 잊히지 않기 위한 표지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