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항일 행적, ‘선명한’ 공산주의 행적
● 韓人으로 태어나 北韓人 거쳐 中國人으로 삶 마감
● 항일운동 기록 적고 빈약… 공산주의 행적은 뚜렷
● 중국 군가의 아버지, 북한 조선인민군행진곡 작곡
● 문재인 정부 국가유공자 추서 추진… 보훈처 반발로 무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인물이다."(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해당 인물 기념사업은 당당하게 추진하겠다."(강기정 광주시장)
한 음악가를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처음 기념공원 조성 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은 좌우 이념 공방,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은 정율성(鄭律成·중국명 정뤼청). 다수 한국인에게 아직은 낯선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잠시 북한인으로 살다 중국인으로 삶을 마감한 음악가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제2국가로 꼽히는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은 국가 '의용군행진곡'을 작곡한 녜얼(聶耳), '황허대합창'의 센싱하이(冼星海)와 더불어 현대 중국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힌다. 다수 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의 별칭은 '중국 군가의 아버지'다.
정율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항일운동을 한 위대한 한국계 음악가"라는 호평과 "북한·중국을 위해 부역한 공산주의자일 뿐"이라는 악평이 교차한다.
선율(旋律)로서 성공(成功)하겠다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이름은 '부은(富恩)'이었지만 집안에서는 '구모(龜摸)'라고 불렸다. 집안은 개신교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 정해업은 미국 남장로회가 설립한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어머니 최영온은 개명한 지역 유지의 후예였다. 최영온의 큰오빠 최흥종은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졸업 후 광주 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을 역임한 저명 목회자였다. 둘째 오빠 최영욱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광주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원장을 역임한 의사였다. 정율성은 슬하 4남 1녀 중 막내였다.일제강점기 정율성의 형제자매는 하나둘씩 중국으로 터전을 옮겼다. 첫째 형 정효룡, 둘째 형 정충룡이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떠난 후 나머지도 뒤를 따랐다. 셋째 형 정의은은 의열단과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1932년 김원봉이 중화민국 국민정부 지원으로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생 모집을 위해 국내 잠입했다.
정의은의 손에 이끌려 정율성도 중국행을 택했다. 중화민국 수도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7개월 교육과정 수료 후 1934년 졸업한 정율성은 난징 구러우(鼓樓)전화국에 잠입해 난징-상하이 간 일본인 전화 도청 업무를 수행했다.
난징에서 암약하던 시절, 소련 출신 성악가 크리노바(Krennowa)와 인연을 맺었다. 크리노바는 "이탈리아에 유학한다면 동방의 카루소(Caruso)가 될 것"이라며 정율성의 재능을 상찬했다. 정율성은 크리노바로부터 1년 간 체계적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 무렵 '부은'이라는 본명을 '율성(律成)'으로 개명한다. '선율(旋律)로서 성공(成功)하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1936년, 정율성은 중국 좌파 청년 조직 5월 문예사(文藝社)에 '5월의 노래(五月之歌)'를 발표하며 입회한다. 조선민족해방동맹에도 가입했다. 당시 국민당의 5차 초비(剿匪·공산당 토벌)작전 끝에 중국공산당은 이른바 대장정을 감행해 산시(陕西)성 옌안(延安)에 새로운 해방구를 마련했다. 정율성도 1937년 10월, 옌안으로 갔다.
난징→옌안→평양, 다시 중국으로
정율성은 루쉰예술학원에 입교해 음악 공부를 지속했다. 재학 시절, 정율성은 삶의 전환점이 되는 곡을 썼다. 1938년 작곡한 '옌안송(延安頌)'이다. 중국공산당 혁명 근거지 옌안을 찬양하는 노래로서 여성 시인으로 명성이 높아가던 모예(莫耶)의 시에 곡을 붙였다. 발표 시 곡명은 '옌안의 노래(延安之歌)'였으나 훗날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옌안 정신을 잘 표현한 곡'이라는 평가를 내리며 옌안송으로 바꾸었다. 곡은 중국공산당 근거지로 퍼져 나갔다.1938년 루쉰예술학원을 졸업한 정율성은 중화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華人民抗日軍事政治大學)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됐다. 이 시기 러시아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10월 혁명 행진곡'을 비롯해 '항전 돌격가' '연수이요(延水謠)' 등을 작곡했다. 반려도 만났다. 군정대학 여학생대 간부 딩쉐쑹(丁雪松·정설송)이다. 1941년 12월, 옌안의 토굴에서 두 사람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943년 유일한 딸 정샤오티(鄭小提·정소제)가 태어났다.
1939년 1월, 정율성은 중국공산당 입당을 신청했다. 훗날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이 되는 무정(武亭·김무정), 북한 정치보위상 등 요직을 역임하는 박일우 등이 신원보증 했다. 신원조회와 심사를 거쳐 4개월 후 정율성은 정식 당원이 됐다.
그해 정율성은 훗날 자신의 대표곡이 되는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했다. 팔로군(八路軍)은 제2차 국공합작 하에 국민혁명군 산하로 편제된 홍군(紅軍·공산군)의 당시 이름이었다. 궁무(公木)가 쓴 가사에 정율성이 곡을 붙였다. 중국공산당군과 마오쩌둥을 찬양·고무하는 내용이었다. 훗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개칭됐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10년간의 중일전쟁이 끝났다. 식민지 조선도 광복을 맞이했다. 12월, 정율성은 아내 딩쉐쑹, 딸 정샤오티와 함께 조선으로 갔다. 남녘의 고향 광주가 아닌 평양이었다. 소련군이 진주한 38도선 이북에는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정권을 장악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원회 선전부장,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장 등으로 활동했다. 2년여 동안 북한 전역을 돌며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작곡에도 힘을 쏟아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중조우의(中朝友誼)' 등을 작곡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김일성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48년에 조선인민공화국 '모범노동자'로 선정됐다.
정율성이 북한에서 활동할 때 아내 딩쉐쑹은 관영 신화사(新華新華通訊) 평양분사 사장으로 일했다. 실질적인 중국공산당의 주북한 정보기구 대표 역이었다. 북조선화교연합총회 비서장도 겸하면서 북한 거주 화교 문제도 책임졌다. 딩쉐쑹은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에게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요청했다. 자신의 출신 배경, 북한 내 역할 등을 두고 북한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이 주원인이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중공군 위해 작곡
딩쉐쑹은 저우언라이의 양녀라 불릴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서신을 보내 정율성 부부 귀환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그동안 중국 공산당이 키워준 우리 조선의 간부가 몇인데 두 사람을 중국에 보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인재들이기는 하지만 아낌없이 보내드리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저우언라이의 요청과 김일성의 화답으로 성사된 정율성-딩쉐쑹 부부의 중국 귀환 직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9월, 정율성은 어머니 최영온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갔다. 10월,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참전한 군대를 따라 12월, 정율성도 다시 북한 땅에 발을 디뎠다.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정율성은 인민지원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전선에 투입된다. 비록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인민지원군을 따라 서울까지 내려온 그는 포화가 빗발치는 최전선을 피하지 않는다. 책상에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정율성의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송서평 중국 시난(西南)과기대학 교수의 논문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 기술도 대동소이하다. "6·25전쟁은 정율성의 창작 격정(激情)을 불러일으켰다. 정율성은 중공군으로 참전하는 4개월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 사기 고취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전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땅크부대' '전사의 맹세' '지원군 10찬(讚)' 등을 작곡했다"고 기록했다.
인민군을 따라 서울에 발을 디딘 정율성은 사대문 내 주요 시설, 고위관료 자택 들을 뒤져 조선궁정악보를 손에 넣기도 했다. '항일음악전사 정율성', 정율성 기념사업을 주최하는 광주문화재단 자료에 따르면 전쟁 중 수집한 궁정악보는 종묘제례악과 연례악 등 2부 18집에 달한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로 포성이 멎었다. 정율성도 중국으로 돌아왔고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공산당 당적도 회복했다. 다시 '중국인'이 된 정율성은 베이징인민예술극원에 배속됐다. 그 시절 중국 전역을 돌며 각 지방 민요를 채록했다. 윈난(雲南), 쓰촨(四川), 네이멍구(內蒙古) 등지의 소수민족 지역을 방문해 그들의 생활상을 반영한 작품을 작곡했다. 훗날 중국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되는 '우리는 행복해요' 등의 동요도 창작했다.
1958년 대약진운동이 전개됐다. 중국공산당은 예술가들도 직접 생산 현장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 정율성도 농촌 인민공사로 배속돼 토법고로(土法高爐·대약진 운동 당시 수제 용광로)를 이용해 철을 생산하는 전민연강(全民煉鋼) 운동에 참가했다. 결과적으로 대약진운동은 2500만 명 이상 아사자를 내고 종결됐다.
‘마오쩌둥 찬가' 작곡으로 晩年 보내
대약진운동 종식 후 다시 한 번 광풍이 몰아쳤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이다. 중국공산당 간부와 더불어 지식인·예술가가 집중 타깃이 됐다. 정율성의 창작 활동도 제약받았다. 중국공산당 영수(領袖) 마오쩌둥 관련 작품은 예외였다.이애련 숙명여대 작곡과 교수는 논문 '정율성 음악연구'에서 문화대혁명 시기 정율성의 작품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정율성은 창작을 할 수 없게 됐다. (···) '반당 분자' '간첩'으로 몰려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정율성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58년부터 시작한 마오쩌둥 시사(詩詞) 가곡 창작에 매진했다. 작곡, 공연 등 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된 문화혁명 기간마저도 정율성의 불타는 창작열을 끝내 꺾지는 못했다. (···)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서 중국 혁명사의 최고탑으로 불리는 마오쩌둥 시사 20편에 곡을 붙이는 창작 작업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젊은 시절 '공산당 찬가'를 창작한 정율성은 만년을 '마오쩌둥 찬가' 작곡으로 보낸 셈이다. 저명 음악가로 훗날 국무원 문화부장이 되는 저우웨이즈(周巍峙)는 "마오쩌둥의 시에 곡을 붙이는데 정율성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대혁명도 종식됐다. 정율성도 12월 17일, 베이징 교외의 낚시터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달리했다. 정율성의 시신은 베이징 바바오산혁명열사묘(八寶山革命公墓)에 안장됐다. 훗날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는 후야오방(胡耀邦)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정율성 기념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고향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연 평균 예산 4억6000만 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문화예술진흥위원회 문예진흥기금 50억 원, 시 출연금 50억 원 등 총 100억 원 규모 기금으로 설립된 광주문화재단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광주 소재 호남대는 2014년부터 부설 공자아카데미와 광주MBC 공동주관으로 정율성 동요합창경연대회를 개최 중이다.
10년 간 기념사업에 쓰인 세금 117억 원
정율성의 생가에는 기념시설도 조성됐다. 광주 남구 양림동에는 2009년 길이 233m의 '정율성로'를 조성했다. 정율성로 벽면에는 사진과 함께 '옌안송' 악보 동판, 관련 기록물,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2018년 동구 불로동 생가터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정율성이 재학했던 전남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교사(校舍) 외벽에는 정율성 벽화가 그려졌고 교실 1칸이 '정율성 교실'로 꾸며졌다.광주의 정율성 기념사업은 '중국'과 밀접한 관련 있다. 2014년 민선 6기 윤장현 시장 취임 후 광주시는 총 사업 예산 71억 원 규모의 '차이나 프렌들리' 사업을 추진했다. 6대 핵심 전략으로 '정율성 브랜드 활용 도시 마케팅 추진'을 명시했다. 구체적으로 △정율성 사적지 주변 정비 △정율성 한·중음악제 프로그램 확대 추진을 시행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총 48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정율성 역사공원도 조성 중이다. 광주광역시, 남구청, 전남 화순군이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정율성의 선양 사업 및 기념 시설을 위해서 사용한 세금은 약 117억 원에 달한다.
실제 정율성의 행적은 국가보훈처 관계자의 발언을 뒷받침한다. 이종한이 쓴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에는 "정율성에게 부여된 임무는 난징 구러우전화국에 침투해 정보를 입수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어에 능숙한 그의 장점을 고려한 배치였다"고 기술했다. 김은식의 '중국의 별이 된 조선의 독립군: 정율성' 기술도 다르지 않다. "부은(정율성의 원이름)은 의열단의 지시에 따라 난징 시내의 구러우전화국이라는 곳에 직원을 가장해 침투했고 일본어나 중국어로 이뤄지는 일본인들의 통화를 도청해 정보를 캐내는 일에 투입됐다." 이는 정율성의 항일운동 관련 기록의 전부다. 이마저도 아내 딩쉐쑹이 1992년 펴낸 전기 '작곡가 정율성'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반면 정율성의 중국과 북한에서 '공산당 찬가' 작곡 활동에 대해서 평전과 관련 자료들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외 관련 논문, 구술 기록 등도 정율성의 친북 행적,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6·25전쟁 중 그의 '예술' 활동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논란의 한 가운데 선 이름 정율성. 그의 삶은 '희미한 항일 행적, 선명한 친공산주의 행적'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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