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럭비정신으로 럭키 인생"
2002~2004년 지도자로 전국 규모 럭비대회 8차례 우승
고교 시절 일본서 열린 한중일 럭비대회 참가, 넓은 세상 경험
학교 부적응 학생 운동치료 동아리 결성, 국무총리상 수상
"럭비 덕에 럭키 인생 살았습니다."
대구 상원고는 지난 8월 육군사관학교 을지구장에서 열린 제50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전국고교 럭비대회에서 우승했다. 12년 만의 정상 탈환이었다. 유진권(58) 상원고 교장이 부임한 지 1년6개월 만에 거둔 전국대회 우승 기록이다.
올해 ‘2023 대한민국체육상’을 수상하기도 한 유 교장은 럭비계에서는 '전설'로 통한다. 학창 시절 1983년부터 1984년까지 2년간 한중일 종합경기대회에서 럭비 국가대표로 경기장을 누볐고, 지도자로서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전국 24개 팀이 참가하는 8번의 전국대회에서 8번이나 우승했다. 9회 우승을 기록할 수 있었으나, 팀이 한중일 종합경기대회에 국가대표로 참석하는 바람에 출전을 포기했다. 3년 동안 한 게임도 놓치지 않았다. 28연승은 대한민국 구기종목 역사에서 최초의 기록이었다. 한국 럭비사를 새로 썼다. 교육자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학교에서 겉도는 아이들을 모아 전국 최초로 운동 치료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해 2007년 운동치료 프로그램 운영 유공 표창(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럭비 선수와 감독, 그리고 교사로서 흠 잡을데 없는 프로필을 쌓았다. 유 교장은 "럭비는 다른 구기 공목과 비교해 워낙 거칠고 돌발변수가 많아 뜻밖의 난관에 맞서 아등바등 싸우는 선수들의 모습이 인생을 닮았다"면서 "럭비 경기장에서 또 교육 현장에서 별의별 어려움에 맞닥트릴 때마다 불굴의 럭비정신으로 돌파했다"고 밝혔다.
선배들과 국제 대회 참가, 넓은 세상에 눈 뜬 계기
유 교장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가을에 럭비를 시작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가 럭비부에 발탁됐다.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운동 대회에만 나가면 늘 상을 탔고, 대구에 온 뒤로도 누나의 지원으로 헬스장에 다닌 덕에 체격이 좋았다. 무엇보다 럭비 특기생으로 해군사관학교에 갈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성주에 계시던 부모님도 럭비부 감독의 말에 흔쾌히 아들의 럭비부 가입을 승낙했다.
당시 상원고(구 대구상업고등학교) 럭비부는 그야말로 전국 최강팀 중의 하나였다. 3학년 선배들이 최고의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었다. 선배들 덕에 1983년 한중일 종합 경기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바로 얼마 전까지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돕던 시골 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의 한 곳을 구경하게 된 것이었다. 대구에 와서 성적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성주에서 '운동도 1등, 공부도 1등'으로 통했던 우등생이었다. 일본 공항에서 내려 숙소를 향하는 길에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도시의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단 사실을 절절하게 느꼈다. 유 교장은 "넓은 세상에서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면서 "세상에 눈을 뜬 계기였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후보로 따라간 일본이었으나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주전으로 뛰던 선배 한 명이 부상으로 빠지는 바람에 그 자리를 메울 후보 선수가 필요했다. 그 자리에 그가 낙점된 것이었다. 외국에서 럭비 시합을 펼친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됐다.
연세대를 거절하고 경북대로 진학한 이유
연세대 럭비부 생활은 화려했지만 모든 일이 생각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럭비 훈련도 충실하게 하고 방과 후에는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나 해군사관학교 입학증을 받지 못했다. 럭비부 감독은 그를 연세대에 추천했다. 11월에 학력고사를 치른 후 바로 서울에 올라가 훈련에 합류했다.
연세대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소위 '연고전'(고연전) 때문이었다. 럭비부는 오로지 연고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한순간을 위해 방학 내내 훈련을 했다. 그때 상원고 선배들이 "여기 들어오면 4년 내내 공부할 시간도 없는 데다 몸이 상하기 마련이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대구로 내려와 경북대에 지원했다.
일반 전형으로 경북대 체육과에 입학했다. 55명 중 2등이었다. 럭비 선수로 전국체전에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면접에서 가산점을 받은 게 주효했다. 럭비 선수로 뛰면서 교원자격증도 함께 땄다. 그렇게 인생의 밑그림을 완성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다양한 경험을 했다. 우선 해군사관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학군장교(ROTC)에 지원해 기갑 장교로 군 복무를 하면서 구성원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법을 익혔다. 군 복무 이후 바로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했다. 제약회사 영업부에서 일곱 달, 경북 포항에서 실내수영장 강사로 일곱 달을 활동하기도 했다. 한 달에 300만원 정도 벌었지만 한 달 만에 모두 써버렸다. 워낙 신세진 선배와 동기가 많아 한 달 동안 밥 사주고 술 사주다보니 주머니가 말라버린 것이었다. 유 교장은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 과소비였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교로 돌아와 18년 만의 우승, 그리고...
첫 부임지는 안동고였다. 9개월 동안 임시 체육 교사를 맡은 후, 1993년 3월에 신암여중을 거쳐 1995년에 신암중으로 발령을 받았다. 신암중에서 럭비부 감독을 맡았다. 신암중 럭비부는 목표가 뚜렷한 운동부였다. 평리중 럭비부를 꺾는 것이었다. 어떤 대회든 평리중 탓에 2회전 진출이 좌절되어온 신암중이었다. 유 교장은 새로운 선수들을 보강해 1년 만에 평리중을 꺾었다. 유 교장이 신암중에 있는 3년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1999년에 모교인 상원고로 돌아왔다. 당시 상원고는 1983년에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한 이후 그때까지 한번도 우승기를 들어올린 적이 없었다. 유 교장은 럭비부 출신 선후배들을 모아 ‘럭비 동문회’를 결성했다. 그렇게 든든한 언덕을 만든 후 총동창회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좋은 선수는 좋은 환경에서 나온다’는 신념으로 후원자를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선수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2000년도 상원고는 18년 만에 전국춘계리그 고교 럭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다음 해에 2번의 준우승을 거머쥐더니, 2002년부터 전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2002년부터 3년간 28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전국 대회에서 8번이나 우승기를 들어올렸다. 3년 동안 참가한 전국규모의 대회를 모두 석권한 것이었다. 당시 전국 럭비팀은 20여 개, 그 중 한 팀도 상원고를 이기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성적을 발판으로 한중일 럭비 대회에 4년 연속으로 출전했다.
'멀티플레이어' 운동부로 국무총리상 수상
모교에서는 럭비 감독뿐 아니라 교사로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교사로서 또 선배로서 학생들을 가장 잘 관리할 것이라는 판단에 학교에서 그에게 학생부장을 맡긴 것이었다. 그렇게 7년 동안 모교에서 근무한 후 화원중으로 갔다.
당시 화원중은 ‘애매한’ 학교였다. 훌륭한 교사들이 많았으나 대부분 진급을 위해 근무를 자청한 이들이었다. 그런 만큼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맡을 교사가 없었다. 그 와중에 사고가 발생했다. 학생 하나가 학교에 불만을 품고 교문에 스프레이로 욕설이 담긴 낙서를 남긴 것이었다.
교장이 그에게 문제 학생들을 맡겼다. 학교 부적응 학생 15명을 모아 ‘멀티플레이어’ 운동부를 만들었다. 다양한 운동과 교양 수업을 섞어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를테면 월요일은 축구, 화요일은 농구, 수요일은 교양 수업, 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솟구치는 에너지는 운동으로 풀고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도 가지게 하자는 취지였다. 계획을 짜고 구성원을 통솔하는 기술은 군대에서 장교로 활동했던 것이 도움이 됐다. 한 학기쯤 동아리를 운영해 육상대회에 출전했다. 달성군에서 1등을 차지했다. 성취를 맛본 아이들은 동아리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잘 지도한 공로로 달성교육상, 교육감상, 교육부장관상, 국무총리상, 모범공무원상을 수상했다. 유 교장의 '멀티플레이어' 교실 프로그램은 2007년 대구에 보급되었고 이후 전국에 전파됐다.
그 뒤로 여러 학교에서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생활지도로 어려움을 겪는 학교들에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유 교장이 나서면 어김없이 학교에 기강이 잡혔다. 상과 벌의 개념보다는 잘못을 할 경우 수행평가를 내주고 이를 성적에 반영했다. 지각을 하면 줄넘기 100개, 배구 언더토스 200개 같은 숙제를 내준 것이었다. 수행평가 점수도 얻고 운동 실력도 향상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불만없이 ‘벌’을 받아들였다. 0교시 체육을 부활하기도 했다. 줄넘기, 탁구, 조깅 등 10여개 종목을 자유롭게 수행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하다가 2022년 모교에서 교장으로 승진했다.
아이들에게 근성과 희망 심어주는 교육자로 남고파
유 교장은 자신의 성과가 모두 럭비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럭비는 영국에서 시작됐다. 스포츠에는 그 스포츠를 만들고 즐기는 이들의 마인드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영국은 가장 거대한 식민지를 가진 나라였다. 전화기도 없던 시절, 개척자들은 미지의 땅에서 다양한 난관 앞에서 스스로 판단해 서로 협동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유 교장은 "축구팀이 경기에서 맞닥트릴 가능성이 있는 변수가 600개라면 럭비는 1,200개의 돌발변수가 존재하기 떼문에 심판이 휘슬을 불면 선수들끼리 힘과 지혜를 모아 희생하고 도우면서 난관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어떤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투지와 개척정신, 그리고 협동심, 그리고 내 한 몸 불사지르는 희생정신이 바로 럭비정신이고 이 정신만 갖추고 있으면 럭비 시합이든 삶의 어려움이든 실패하지 않는 선수와 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과 공부가 머리에 지혜를 심는 것이라면 스포츠는 뼈와 근육에 근성과 마인드를 심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스포츠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일 것입니다."
유 교장은 "아이들 모두 자신만의 경기장에서 동료들과 최선을 다해 삶의 목표를 하나씩 성취해나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면서 "럭비인으로 교육자로서 아이들에게 근성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김도은 대구한국일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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