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의 주자학(朱子學), 한국 문화를 어떻게 바꿨나?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5회>
2000년대 초 미국 하버드 대학을 방문 중이던 일본의 한 유명 대학 명망 높은 철학자가 다가와선 무척이나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한참을 머뭇머뭇 주저하면서 가슴에 품어 왔던 듯 긴 질문을 어렵사리 던졌다.
“마······ 에······ 저의 개인적인 견해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통 시대 한국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제가 느낀 바로는 한인 지식인들은 어떤 사상이든 한 번 받아들이게 되면 오직 그 사상만을 붙잡고 끝까지 한 방향으로만 밀고 나가는 독특하고도 기이한, 강력하면서도 저돌적인 사상적 경향성이랄까, 이념적 편향성이랄까, 마······, 그런 모습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한데, 저의 이런 느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 한 과문한 일본인 학자의 사적인 견해란 점을 감안해서 생각해 주시면, 마·······, 에······,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질문을 받고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국의 지적 전통이 지적 편향성을 보인다는 부정적 지적이라 한국인으로서 그리 유쾌할 수는 없었다. 다만 외국인의 고정관념일지라도 왜 그 사람이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었는지는 그 이유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자학을 수용한 조선 유학사가 오직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지적 편향성을 보였다는 점, 또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북한이 지금도 김일성 수령 유일주의를 고집하는 이념적 극단성을 보인다는 점, 그 두 가지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 일본 교수의 지적이 완전히 빗나갔다고 말할 순 없을 듯하다.
조선 유생들은 왜 주자에 열광했나?
조선 유생 대다수는 중국 남송(南宋, 1127~1279)의 주희(朱熹, 1130~1200, 朱子)를 정신의 스승으로 우러르고, 떠받들고, 섬기고, 따르고, 그리고, 바라고, 닮으려 했다. 그들은 주자의 주석을 통해서 경서(經書)를 독송하고, 주자의 문장으로 사고력을 배양하고, 주자의 예제(禮制)를 본받았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실학(實學)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아직 널리 퍼져 있지만, 조선의 실학은 주자학의 거부나 지양(止揚)이 아니라 주자학의 울타리 안에서 전개된 사상적 혁신 운동 정도였다.
왜 조선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중화 문명 그 수많은 스승 중에서 유독 주자만이 절대 진리를 설파했다고 굳게 믿었을까? 주자는 대체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그들은 주자를 그토록 숭앙했나? 진정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주자학 자체의 미덕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한당(漢唐) 시대의 유학에 비하면 더 심오하고, 더 정교하고, 더 체계적인 학문이었다. 물론 한당의 유가 경학사에도 성리학 못지않은 강력한 진리 주장과 심오한 사상 체계가 있었지만, 주자학처럼 일목요연,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짚어주는 철학적 정요(精要)함은 없었다. 주자학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대전제 위에서 주자학은 공부(工夫)의 방법과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제공했다. 주자학은 동아시아 학인들에게 일신의 수양뿐 아니라 집안을 일으키고, 나라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원대한 이상을 설파했다.
주자학에 입문하면 누구나 천지와 인간을 아우르는 거대한 진리 주장을 접하게 된다. 조선의 유생들은 한결같이 주자학이 우주의 섭리(燮理)와 만물의 천리(天理)를 관통(貫通)하고, 인간의 도리(道理)와 사회의 공리(公理)를 설파하고, 경세(經世)의 실리(實理)와 치국의 대리(大理)를 제시한다고 믿었다. 주자학에 대한 조선 유생의 믿음은 실로 공고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 믿음은 더욱 외곬으로 강화되었다.
또한 주자학이 조선 왕실과 엘리트 집단에 통치의 정당성, 정치적 지배력, 사회적 책무감을 부여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고대 문명에서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부는 국경 수비와 치안 유지로 정치적 지지를 얻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여 사회적 신뢰를 얻고, 이념의 설파로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한다. 주자학에 따르면, 군주는 만백성을 이롭게 하는 평천하(平天下)의 주체가 되며, 엘리트 집단은 지방 사족으로서 치국(治國)의 임무를 진다. 통치 이념으로서의 주자학은 조선 왕실과 엘리트 집단에 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적 권위를 주었다.
그러나 주자학의 사상적 내용만 짚어서는 여말선초 한반도에서 주자학이 퍼진 이유를 제대로 밝힐 수 없다. 어쩌면 그 사상적 내용보다 당시의 국제 정세가 더 큰 힘을 발휘했을 수도 있다. 주자학 확산의 가장 큰 외적 요인은 바로 14세기 초엽 몽골 원(元) 제국에서 이미 주자학이 관학으로서 정통의 지위에 올랐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주자학은 몽골 제국의 ‘보편이념’
1231년에서 1270년에 걸쳐 몽골에 복속된 고려는 주자학이 몽골 원 제국의 정통 이념으로 부상한 후 제국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그 이념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3세기 후반 몽골 원 제국 수도 연경(燕京, 현재 베이징)은 주자학의 메카로 거듭났다. 연경에 간 고려 유생들은 주자학 서적을 필사하고 주자의 초상화를 구해서 귀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북방 스텝 지역에서 일어난 몽골족은 중국의 농토를 다시 갈아서 초원으로 만드는 대신 남송 시대 새롭게 일어난 주자학을 제국의 관학으로 채택하는 통치의 지혜를 발휘했다. 방대한 지역을 군사적으로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한 몽골은 고루한 관습과 종족적 편견을 버리고 다양한 지역의 여러 종족을 통합할 수 있는 보편 이념을 찾았고, 그들은 다름 아닌 주자학을 발견했다.
연경에 간 고려 유생들은 몽골식 유목 문화가 아니라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설파하는 주자학을 발견하고 열광했다. 다만 고려 유생들이 각축하는 제자백가의 여러 사상 중에서 유독 주자학만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이미 몽골 제국의 공식 이념이 된 주자학을 사후적으로 흡수했다는 점은 지적 종속성을 보여준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이미 발달한 중심부의 문화가 주변으로 물밀듯이 스며들어 요원에 번지는 불길처럼 무섭게 퍼져가는 과정을 흔히 본다. 흔히 문화접변(acculturation)의 개념으로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충돌하여 일으키는 사회적, 정신적, 문화적 변화를 설명한다. 문화접변이 일어날 때 외래에서 밀려드는 강력한 문물을 접한 주변부의 사람들은 전통적 가치관과 습속 대신 새로운 사상과 신념을 받아들이는 개종(改宗, 혹은 전향, conversion)을 체험하게 된다.
특정 집단이나 부족이 외래의 종교나 사상을 받아들여 신념화하는 과정은 실로 놀라운 현상이다. 토착 부족의 다신교를 섬기던 사람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유교 전통의 지식인이 기독교 신자로 거듭나고, 20세기 초반 중국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과정을 돌아보면, 개종 혹은 전향이란 개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가히 내면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내면적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외적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한 집단이 고유의 전통, 관습, 문화를 버리고 외래의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학자들은 교차-문화적 개종(cross-cultural conversion)이라 부른다. 때론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압박(pressure)에 못 이겨 외래의 사상, 문화, 종교, 관습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때론 군사적 침략 상태나 경제적 영향 아래에서 장시간에 거쳐 한 집단이 외래문화에 적응(assimilation)하는 사례도 보인다. 때론 지식인들이 거부감 없이 적극적으로 외래의 선진 문화를 과감하게 수용하는 자발적 유대(voluntary association)의 사례도 있다.
고려 유생들이 연경에 가서 주자학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군사적 압박이나 자연스러운 적응 과정이라기보다는 지식인의 선택에 의한 자발적 유대에 가깝다. 다만 고려로의 주자학 전파는 군사 침략을 통한 정치적 복속 이후에 전개됐으므로 고려 유생들이 주자학을 수용하는 과정은 자발적 전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당대의 국제 정세 아래서 주자학은 제국의 이념이 되었고, 그 제국의 질서에 복속된 고려의 유생은 역사의 순리에 따라 주자학을 학습하고 수용했다.
고려 유생들이 발견한 주자학은 칭기즈칸의 인격 숭배를 강요하거나 유목민의 고유 전통을 미화하는 고루(固陋)하고 편벽(偏僻)한 이념이 아니라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고 인간의 향상과 인류적 공영을 지향하는 윤리적 보편성과 문화적 개방성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주자학은 도덕 수양, 인격 향상, 보편 교육, 마을 공동체 건설, 공평무사, 위민(爲民) 통치 등의 가치를 선양한다. 오늘날 범인류적 관점에서 보아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 보편 가치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이 고려 유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세기 복속된 변방의 번국(藩國)으로서 몽골 원 제국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고려 유생들은 성리학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교차-문화적 전향을 체험한다. 그들은 주자의 문장을 읽으며 가슴 깊이 공감했고,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그 감명은 그들의 내면에서 자발적인 개종의 체험을 낳았다. 급기야 퇴계와 율곡이 활약하던 16세기에 이르면 주자학을 신념화한 사대부 집단이 사회 엘리트로 공고하게 자리 잡았다.
지적 편향성과 이념적 극단성
제국의 수도에서 주자학을 접한 고려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주자학으로 전향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조선 개국 이후 주자학이 국가의 공식 이념이 되어 지식계를 통일하는 과정도 세계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장면이다. 문제는 그렇게 그 이후 조선 사상사가 오로지 주자학만을 절대 진리로 강변하는 지적 편향성과 이념적 극단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중국에선 15~16세기를 지나면서 주자학을 비판하는 양명학(陽明學)이 나오고, 이어서 성리학을 넘어서는 고증학(考證學)이 발흥했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사상사에선 주자학을 “억측에 근거한 망설(妄說)”이라 비판하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가 등장하여 이후 경험과 실증을 강조하는 특유의 미토학(水戶學)을 낳았다.
이와 달리 여섯 세기에 걸친 조선 사상사는 오직 주자학에만 매몰되었다. 여말선초 한반도 학인들의 눈에 비친 주자학은 당대 최고의 선진적 이념일 수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때까지 오직 주자학만을 절대 진리라 신봉하는 집단이 있다면, 이념의 교조화란 비판을 면할 수가 없다. 대체 왜 조선의 학인들은 그토록 주자학 일변도로 흘렀을까?
세상의 모든 사상, 이념, 종교는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바뀌고 인간의 경험적 지식이 늘어나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14세기에 들여온 주자학을 20세기 초반까지 절대 진리라 믿었다면, 국제 정세에 어둡고 현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집단의 종교적 맹신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정 사상에의 집착은 지적 편향성을 낳고, 지적 편향성은 이념적 극단성을 불러온다.
멀리 볼 필요 없이 한반도의 현대사가 그 점을 웅변한다. 20세기 여러 나라에 공산주의가 전파됐지만, 북한에선 이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극단적이고, 교조적이고,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김일성 수령 유일주의가 만들어졌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공산주의 자체가 전 세계를 향해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교조적 이념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 민주, 인권, 법치를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이 북한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고,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문화 선진국으로 도약한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이념 자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주자학적 사유 방식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요구된다. 주자학적 사유의 관성이 남아서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다음 회에선 주자학의 논리적 모순과 이론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할 예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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