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은근한 에로티시즘 혹은 춘정(春情)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에로티시즘(eroticism)'

사전적 의미로는 '남녀 간 사랑을 암시하는 경향'이며, 미술이나 문학에서 성적(性的) 분위기를 묘사하는 일을 뜻한다.

잘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말로는 '춘정(春情)'이다. 노골적인 성애(性愛) 그림을 '춘화(春畵)'라고 하듯이 남녀 사이 애욕에는 '봄(春)'이 무르익는다.

우리 미술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춘정 화가는 신윤복(1758~?)이다.

젊은 남녀가 달밤에 몰래 만나는 장면을 그렸으며 <'월하정인(月下情人)'>

'월하정인' 간송미술관 소장

여인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동자승들을 풍자했으며 <'단오풍정(端午風情)'>

'단오풍정' 간송미술관 소장

상복 입은 과부가 수캐와 암캐 한 쌍이 어울리는 걸 보고 웃고 있는, 발칙하다 못해 사회 관습에 도전하는 듯한 뉘앙스도 풍겼다. <'이부탐춘(嫠婦耽春)'>

'이부탐춘'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은 장막에 싸인 인물이다. 뛰어난 재주를 보여 부친에 이어 도화서 화원(畵員)이 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외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일설에 의하면 춘정을 주로 그렸다는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태어난 해는 알려졌지만,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죽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어떤 TV 드라마에선 그를 남장 여자로 왜곡시킬 정도였다.

그럼, 신윤복 작품 중 최고조에 오른 춘정 작품으로 평가받는 건 어떤 그림일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저자인 최순우는 이렇게 말하며 아래 그림을 신윤복 최고 걸작으로 꼽았다. "있는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다"

'사시장춘(四時長春)', '언제나 봄'이다.

'사시장춘' 간송미술관 소장

별당 방문이 나무에 가려 살짝 보이고, 방 입구에는 분홍 여자 신발과 남자 검정 가죽 신발이 놓여 있다.

여자 신은 가지런하지만, 남자 것은 흐트러져 있다. 신발 모양을 보면서 여자 손을 끌고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상상한다. 절묘한 은유다. 오른쪽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 묘사는 또 어떤가?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그림이 절묘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 남녀가 아니라,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낸 소녀 덕분이다.

술상을 들여야 할 거 같지만 방 안 사람들을 부르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한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다.

신윤복은 이 작품에서 '은근히' 보여주는 방식으로 춘정을 '흠뻑' 표출했다.

영화에서도 남녀 전라(全裸)보다는 일부만 노출한 장면이 성애를 더 자극하고, 소설에서도 노골적인 서술보다 함축적인 표현이 더 짜릿하다.

이처럼 채우지 않을 때, 목표에 향해 있을 때, 조금 가려 있을 때 호기심은 높아지고 자극은 커진다. 주목받는 미술이나 영화는 이런 요소를 잘 이끈 것들이다.

욕망이란 결핍의 다른 이름이다. 욕망이 채워질수록 오히려 결핍은 커진다. 그 역설을 신윤복 그림으로부터 알게 된다.

doh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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