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잇수다] 형량 줄이려.. '피고인의 반성문' 믿을 수 있나?
형량 줄이고자 반성 없는 반성문도 지속
판사 질책부터 형량 늘리는 엄벌 사례도
대법원, 진지한 반성 기준 구체화 조치해
"교화 위해서 진지한 반성의 길 열어둬야"
[법잇수다는 별의별 사건 중 화제가 되거나 의미 있는 판결을 수다 떨 듯 얘기합니다. 언젠가 쏠쏠하게 쓰일 수도 있는 법상식도 전합니다.]
‘교도소를 와보니 너무 무섭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판사가 언급한 피고인의 반성문 일부입니다. 이 피고인. 초등학생을 때리고 협박해 불법 촬영까지 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10대 A양입니다.
지난달 열린 첫 공판에서 제주지방법원 재판장은 자신의 힘든 점만 강조한 반성문을 여러 차례 쓴 A양을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진지한 반성은 않고 형량이 줄어들길 바라는 태도 때문이겠죠. 사실, 반성없는 반성문을 냈다가 법정에서 혼쭐이 난 피고인은 한둘이 아닙니다.
때문에 범죄자의 반성문을 법원이 참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판사는 피고인이 낸 반성문을 어떻게 읽고 판단할까.
■ “끔찍한 사건...피해자가 어땠을지 생각을”
A양은 지난 6월 자신을 험담한 B양에게 앙심을 품고 서귀포시 한 놀이터에서 또래 공범과 B양을 폭행한 혐의를 받습니다.
B양이 피해 사실을 경찰에 알리자 A양은 며칠 뒤 또다시 B양을 때렸고, 옷을 벗게 한 뒤 촬영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재판에 넘겨진 A양은 법원에 10여 차례 넘는 반성문을 써냈습니다. 재판부는 A양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꼼꼼히 읽었습니다.
지난달 17일 첫 재판에서 재판부는 A양의 반성문을 지적하며 “대부분 교도소에 처음 와보니 무섭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내용”이라고 질타했습니다.
이어 “피해자가 겪은 고통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너무 끔찍한 사건이다. 자신의 범행으로 상대방이 어땠을 지를 생각하라”고 꾸짖었습니다.
■ 성인도 반성 없는 반성문 써 법원에 낸다
비슷한 반성문 또 있습니다. 2020년 제주시 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소속 직원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고, 껴안는 등의 범죄를 저질러 실형에 처해진 60대 남성 C씨.
범행은 업무 시간에 국장 개인 사무실에서 이뤄졌고, 범행 횟수만 10여 차례였습니다. 2021년 C씨는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 받았습니다.
C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습니다. 반성문도 냈습니다. 그런데 이 반성문. 형량을 줄이기는커녕 형량이 되레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재판부는 “반성문에서 잘못을 뉘우치기보단 상사 입장에서 실수임을 강조하고 ‘잊고 새 출발하라’고까지 했다. 미안함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밖에도 항소심 재판부는 C씨의 지위, 범행 횟수, 장소 등을 고려하면 죄질이 가볍지 않다며 1심 양형에서 14개월 늘어난 징역 2년을 선고했습니다.
또 2021년 어린이집 교사들이 원아를 학대해 열린 재판에서도 교사 일부가 유사한 내용을 반복해서 쓴 반성문을 제출해 법원이 이를 꼬집기도 했습니다.
■ 반성문 ‘잘 내면’ 진짜 감형됐었어?
대법원 양형기준에 ‘진지한 반성’이 감경요소로 포함돼 있습니다. 진지한 반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게 반성문이다 보니 강력 범죄자도 씁니다.
‘n번방’ 주범 조주빈은 반성문을 100번 넘게 써냈습니다. ‘과외앱’으로 만난 20대를 살해한 정유정도 수차례 반성문을 판사에게 제출했습니다.
피고인이 진지하게 반성을 하고 있는지는 사건 담당 판사가 판단합니다.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하기 어렵겠죠. 때문에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판사가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을 인정해 10명 중 4명은 형이 줄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대법원이 민주당 송기헌 의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심 사건 중 양형기준 '진지한 반성'이 적용된 사건은 전체의 40%에 달했습니다.
특히 성범죄는 '진지한 반성' 양형기준 적용 비율이 70% 이상이었습니다. 인면수심 범죄자가 감형을 목적으로 반성문을 내면서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양형기준에 ‘진지한 반성’을 제외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범죄자가 쓴 반성문을 왜 받아주느냐는 지적도 잇따랐죠.
■ 법원은 반성문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그래도 판사는 반성문을 읽습니다. 사건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판사는 반성문에서 피고인이 진지하게 뉘우치고 있는지 판단합니다.
이를 통해 교화 가능성이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했는지,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용서를 구했는지 등까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꽤 꼼꼼히 읽기 때문에 피고인의 반성문은 법정에서 판사의 입에 종종 오르내리곤 합니다.
반성문에 무섭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한 A양이나 성범죄를 저질러 놓고 상사의 입장에서 타이른 C씨의 반성문이 판사의 눈에 좋게 보일리 없죠.
여기에 대법원은 지난해 '진지한 반성'을 △범행을 인정한 구체적 경위 △피해 회복이나 재범 방지를 위한 노력 등이 인정될 때로 구체화했습니다.
진지한 반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강화되면서 법원 판결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대법원에 따르면 진지한 반성을 이유로 감형 받은 성범죄 사건 피고인 비율(1심 기준)은 2019년 70%에 달했는데 2021년에는 27%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또 지난해 6월부터 지난 2월까지 성범죄 사건에서 반복적인 반성문 제출을 ‘진지한 반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대검찰청 통계도 있습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처벌도 중요하지만 다시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 교화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진지한 반성’의 잣대가 될 수 있는 반성문이나 피해 회복 노력,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열어두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정용기 (brave@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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