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홍범도가 공산주의자입니까?”[인터뷰]
[주간경향] 역사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100년 전 민족의 영웅이 100년 후 주적과 사상적으로 동조한 인물로 평가가 바뀐다. 이대로면 앞으로 한국의 위인들은 100년 후 정치 변화까지 정확히 예측해 행동한 인물이어야 한다. 후손들은 2023년 역사에서 배운 그대로 자신들의 시대적·정치적 잣대로 100년 전 인물을 난도질할 수 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을 윤석열 대통령,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등도 예외가 아니다. 동일한 잣대라면 우파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입장은 100년 뒤 시대 상황에 따라 ‘민족 반역’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의병이자 독립군 대장이며 민족적 자부심인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항일 활동은 인정하지만”이라는 단서와 함께다.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돌아가실 때까지 공산당(원)으로서의 활동을 했다”는 주장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홍 장군 흉상 이전,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 명칭 변경 검토 등이 이를 방증한다.
차라리 ‘반공’, ‘반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홍 장군 지우기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해라도 쉽다. 국방부는 홍 장군 논란을 설명하며 자꾸만 ‘역사적 흔적’, ‘학계의 논란’ 등의 허술한 사회과학적 잣대를 동원한다. 실제로 지난 9월 4일에는 홍 장군의 공산주의 이력과 관련한 입장문 작성에 참고했다며 문서 목록까지 공개했다. 해당 목록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사람 중에는 국내 홍범도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도 있다. 반 교수는 국제공산당 국제대회인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이른바 ‘극동민족대회’) 개막식에 참석한 홍 장군이 촬영된 영상물을 발굴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평생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권위자의 책, 논문을 참고했다고 하니 “국방부 주장이 맞나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9월 5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난 반 교수는 “내 책, 논문도 봤다고 합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읽고 해석하길래 결론이 그렇게 나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홍 장군 논란이 불거진 이후 반 교수는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 하지만 한 줄, 두 줄 정도 인용되는 그의 말만으로 입장문 발표, 언론 설명까지 하고 있는 국방부 논리에 대한 완벽한 반박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주간경향은 국방부가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들고 반 교수에게 하나하나 처음부터 물었다. 그 결과 기본적인 용어, 시대 상황, 국제정치적 움직임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홍범도는 공산주의자’ 주장의 허술함이 서서히 드러났다. 특히 “홍 장군을 둘러싼 논란 전후로 국방부나 정부에서 홍 장군에 관해 문의해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번도 없었다”는 그의 대답에서 해당 논란이 여론, 학계, 언론 등의 동의를 목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독립군 대장 홍범도의 삶은 어떻게 봐야 하나.
“홍 장군을 이해할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신분이다. 의병장이나 독립군 대장은 주로 유생, 양반, 고급관료 출신 등이 많았고, 경제적으로 보면 대체로 지주 출신이었다. 그런데 홍 장군은 이른바 ‘머슴’ 출신이다. 부모님이 어린 나이에 돌아가시면서 양반집, 부잣집 머슴으로 전전하며 살았다. 홍 장군의 행보를 보면, 계급적 억압·착취 등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 신분적·경제적 차별이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열다섯 살에 나이를 속이고 군대에 가서 나팔수(곡호수) 생활을 했는데 차별을 견디다 못해 장교를 살해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후 금강산의 유명 사찰 신계사에 몸을 의탁하며 1년 정도 승려의 길을 간 행적도 있다. 종합하면 홍 장군은 계급적·신분적 차별을 이유로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체화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차별에 대한 반감을 국가 간 관계로 확대하면,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도 볼 수 있지 않나.
“실제로 두 번째 특징이 ‘항일 투쟁의 역사’가 어떤 독립군과 비교해도 빠르고 길다는 데 있다. 홍 장군 관련 자료 중 세간에 많이 알려진 것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쓴 ‘입국신고서’다. 직업은 ‘의병’, 입국 목적과 희망은 ‘고려독립’이라고 적어서 화제가 됐는데 잘 주목하지 않는 부분 중 하나가 홍 장군이 의병이라는 직업과 함께 쓴 ‘28년’이라는 기간이다. 이를 토대로 역산해 보면, 홍 장군은 적어도 1894~1895년부터 의병활동을 한 것이다.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 때부터 홍 장군이 항일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병부터 독립군 활동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온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나.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홍범도다. 특히 이렇게 여러 차례 의병, 독립군으로 나선 사례는 없다. 이런 홍 장군을 두고 국방부가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에 사실상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경력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홍 장군이 1868년생이다. 비교 대상으로 언급하는 지(이)청천 장군은 1888년생이고, 김좌진 장군은 1889년생, 이범석 장군은 1900년생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지 장군과 비교해도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자유시 참변 이후라고 하면 홍 장군 나이가 최소 쉰셋이다. 국방부 말대로라면 연로한 장군이 대체 몇 살까지 만주, 연해주 등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항일 투쟁 기간을 최소로 잡아도 28년이다.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와 비교해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직업을 ‘의병’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인식이 분명한 장군을 두고 독립투쟁의 역사가 어떻고, 업적이 어떻고 따지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마지막 특징은 무엇인가.
“홍 장군 가족이다. 나는 학자로서 홍 장군 일가를 ‘독립운동 명가’라고 부른다. 온 가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홍 장군의 부인 단양 이씨는 안타깝게도 실명이 알려지지 않지만, 의병 활동에 조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아들 홍양순은 홍범도 부대 중대장으로서 1908년 정평 전투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둘째 아들 홍용환 역시 독립군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홍 장군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일본은 홍 장군을 체포할 수 없으니 가족을 인질로 잡고 회유하려 했다. 이를 주도한 것이 조선인 김원홍, 임재덕 등으로 구성된 일진회 간부들이다. 이들은 단양 이씨를 고문하며 홍 장군을 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단양 이씨가 ‘홍 장군은 회유될 사람이 아니다’며 거부하니 편지를 조작하기까지 한다. 홍 장군을 회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람들도 보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자 큰아들 홍양순을 보낸 적도 있다. 아들은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홍 장군이 아들을 꾸짖고 총을 쏜 일화가 있다. 홍 장군 일가는 독립운동이라는 제단에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홍 장군 가족에 관해서는 일본군이 입수한 첩보로 추정해야 할 정도다. 항일 투쟁을 주도한 인물들이 주로 양반, 고위 관료 등의 명문가 출신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이러한 특색은 더욱 두드러진다. 머슴 출신으로 사실상 나라의 도움을 받은 바가 없음에도 집안 전체가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이런 사례는 정말 찾기가 힘들다. 홍 장군 집안이야말로 진짜 명문가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홍 장군 행적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모든 논란의 시작과 끝에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참변’이 있다. 국방부는 ‘홍 장군님이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인 행적이 독립운동 업적과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학계에서 이런 논란이 있나.
“국방부가 역사적 인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면, 가장 최신의 연구 성과까지 살펴보고 관련 연구자 등과도 충분히 논의한 뒤 문제 제기를 했어야 한다. 이 과정이 결여되다 보니 논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지난 2021년이 자유시 참변 100주년이었다. 이때 학술회가 개최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유시 참변 관련해서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홍 장군이 참변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나, 책임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어느 정도인가, 홍 장군을 대표로 하는 간도에서 올라간 독립군들은 참변의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등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이 논란이 된 것은 최근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공개하기도 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 같은 문건 때문이다. 홍 장군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명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공동명의로 1921년 9월 15일자로 발표한 이 문건에는 ‘우리의 수적(원수인 적)은 자못 일본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 및 유산자이며 홍(紅)O와 같은 외홍내백(外紅內白: 겉으로는 붉지만 속은 하얀)한 가면 공산당원들이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문건만 보면,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가해자로 가담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자유시 참변부터 정확히 좀 설명해 달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부대들의 이합집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당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을 통합해 하나의 체계로 일본군과 무장투쟁에 나서려고 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 원동부와 연결된 이른바 ‘상해파’가 대한의용군을 창설해 통합을 주도했다. 홍 장군 등의 간도에서 출발한 독립군 부대도 이 대한의용군에 가담한다. 그런데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후원을 받은 이른바 ‘이르쿠츠크파’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만들면서 주도권을 가져오게 된다. 통합의 주도권이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홍 장군 등 간도 독립군도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정회의 쪽으로 옮겨 가게 됐다. 지휘부 구성과 통합군대의 편제 등을 둘러싸고 양측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1921년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나선다.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고 한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 장군 행보에 문제 제기를 하는 논거는 참변을 정당화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과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을 재판하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 등이다. 자유시 참변 관련해서 과거 학계에서 논란이 있었던 부분도 이와 같다. 그런데 홍 장군 행보를 액면 그대로만 보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인가.
“우선, 무장해제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독립군들이 누구냐 하는 점이다. 당시 현장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최진동, 허근 등이 이끌던 부대가 합쳐져 만들어진 ‘총군부’라는 부대다. 무장해제 과정에서 현장에서 36~37명이 사살됐다. 그런데 피살된 독립군을 이끌었던 최진동, 허근은 안무, 지청천 그리고 홍범도와 함께 간도에서 올라간 독립군들이었다. 즉 대한의용군 쪽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간도 독립군들이 빠져나갔는데 미처 나가지 못한 총군부 소속, 정확히는 허근의 의군부 소속 독립군들이 일부 남아 있었고, 이들이 총살당한 것이다. 그런데 1921년 11월 초까지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 대한의용군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잇달아 발표하는데 이들 문건에 의병대 영수로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허근), 안무, 지(이)청천의 이름이 나온다. 정리하면 홍 장군을 비롯한 간도 독립군 장군들이 자신과 함께한 부대가 피해를 입은 것이 정당하다고 옹호하고, 해당 부대를 공격하는 문건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굉장히 어색한 일이지 않은가. 이에 후속 연구가 진행됐고, 그 결과가 하나씩 나오고 있다. 우선 1921년 10월, 허근 등이 코민테른에 제출한 <자유시 참변에 대한 보고서>에는 ‘귀 의회정부가 총사령관을 보내 풍파를 야기하려 자유시에서 한국군대를 포위·공격했다’며 참변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강력하게 요구한 문서가 발견된다. 또 같은해 12월 14일자로 홍범도, 최진동, 허근, 지청천 등 간도 독립군 장교 28명이 상하이파의 핵심 인물인 김동한에게 참변 관련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 상하이파는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다. 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이 피해 측 인사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1922년 2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했던 홍범도, 최진동이 김동한과 공동명의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여기에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르쿠츠크파)이 최후통첩을 했지만 서명을 거부했다’며 ‘동의 없이 임의로 (우리) 이름을 넣었다’고 폭로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즉 그동안 이해가 안 됐던 문건이나 홍 장군의 재판 참여 등의 행적이 실상은 명의도용이었고, 이르쿠츠크파의 속임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국방부가 최신 연구는 보지 않고 섣부른 논란을 만든 것 아닌가. 국방부가 홍 장군 행보에 문제 제기한 논거를 보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다’, ‘소련공산당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면서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됐다’는 것 등이다. 각각에 대해 어떻게 보나.
“먼저 용어부터 제대로 써야 한다. 소련공산당 군정의회 그런 게 어디 있나. 1921년 당시 소련이 성립되지 않은 사실조차 알지 못한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용어를 섞어서 설명하면 안 된다. 당시 독립군 활동에 유리한 쪽이 어디였는지가 홍 장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하는 것은 맞다. 다만 독립군을 처벌하기 위해 들어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재판 관련해서 홍 장군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등과 재판 과정이 국제공산당 집행위나 소비에트 정부 혁명군정의회 등 중앙의 승인하에 진행된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국제공산당 동양혁명책임자인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 간도독립군 지도자들을 기만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재판 참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소련 적군 소속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 당시 국제정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국방부는 당시 러시아지역이 전부 소비에트러시아였던 것처럼 말하는데 극동지역의 공식 정부는 ‘원동공화국’이었다. 명목상 국가에 가까웠는데 시베리아에 진출(침입)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면서 소비에트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이른바 완충국가(Buffer State) 역할을 했다. 원동공화국은 ‘인민혁명군’이라는 자체 군대도 갖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국제적 배경에서 당시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들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봐야 한다. 당시 일본은 소비에트러시아든 원동공화국이든 독립군을 후원하는 것에 강력히 항의했다. 독립군이 별도의 군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에 독립군이 아닌 원동공화국 소속 ‘인민혁명군’, 소비에트러시아 소속 ‘적군’으로 명목상 편재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었다. 실제로 홍 장군은 원동공화국인 자유시에 있을 때는 ‘인민혁명군 제2군 29연대 소속’이었고, 소비에트러시아인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후에는 ‘적군 5군단 소속’이 됐다.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실질은 독립군 그대로였다는 것인가.
“그렇다. 명목상 편재라는 증거는 또 있다. 당시 독립군이 인민혁명군이든 적군이든 그 지위는 간도 시절의 지위에 부합하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예를 들어 홍 장군은 간도에서 지휘했던 부대 규모가 대대급이어서 제1대대장으로 되고, 지(이)청천은 사관학교 교장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임명되는 식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라. 홍 장군이 진짜 소비에트러시아 적군의 대대장이면 기록도 남고, 시베리아 내전이 끝난 후에는 장교로서 승승장구해야지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 말이 되나. 소비에트러시아, 원동공화국, 일본과의 관계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소련’, ‘반공’ 등만 앞세워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대체 역사자료를 어떻게 보고, 연구해서 이런 결론을 낸 것인지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인가.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첫째로 홍 장군은 소련공산당에 가입해 어떠한 직책도 맡은 적이 없다. 기껏해야 소련공산당에 뒤늦게 입당한 평당원이다. 둘째로 당시 홍 장군이 가입한 소련공산당을 어떻게 볼 것이냐 문제다.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라는 이들은 공산당의 개념부터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공산당(혁명 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소비에트 정부 수립 후 러시아공산당으로 개칭)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전위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하고 갖은 회유에도 끝까지 철의 규율로 무장한 자신의 이념을 지키는 이들이 가입한 그런 정당이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당은 사회를 변혁시키고 이념으로 무장하고 그런 정당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된 사회에서 대중정당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일정한 자격이 있고, 문제가 없으면 가입할 수 있는 정당이 된 것이다. 홍 장군은 1927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다. 셋째로 만약 홍 장군이 정말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라면 그 이전 시기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18년 한인사회당, 1921년 고려공산당, 1925년 국내에서 창립한 조선공산당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조차 홍 장군을 영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1920년대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볼 때 홍범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홍 장군은 왜 뒤늦게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나.
“생계 문제다. 1929년이면 홍 장군이 연금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데 공산당원과 비공산당원이 받을 수 있는 지원 격차가 컸다. 당시 홍 장군은 재혼도 하고, 가족이 늘어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활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자신을 평생 믿고 따라준 독립군 부하 중 만주나 국내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을 위해 집단 농장을 꾸려가야 했다. 정부에 땅을 신청하고 불하받고 각종 시설 제공 등 혜택을 받으려면 공산당원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홍 장군에게 좋은 땅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황무지에 가까운 땅을 불하받고 개척하는 상황에서 무슨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이념 투쟁을 하고, 혁명을 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홍 장군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까지 당한다. 정말 홍 장군이 소련공산당의 핵심 당원이고 유력 인사라면 아랄해에 가까운 카잘린스크라고 하는 시골로 70세에 가까운 노인을 보내버리겠나.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럼에도 왜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는지까지 따지는데.
“홍 장군은 1908년에 러시아로 간다. 1943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으니 30여 년간 산 셈이다. 일생의 약 절반은 러시아에 머물렀던 셈이다. 홍 장군을 비판하는 이들이 왜 김좌진, 이범석 장군처럼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느냐 묻는 것을 봤다. 두 장군과 홍 장군의 활동 근거지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지적이다. 김좌진, 지(이)청천, 이범석 장군처럼 만주가 활동 근거지인 사람들과 러시아가 활동 근거지인 사람을 비교하면 어떡하나. 게다가 홍 장군은 국내에서도 하층민에 속하는 머슴 출신이다. 이 분이 국내에서 성장한 환경과 비교할 때 노동자·농민의 생활권을 강화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토지까지 재분배하는 상황은 충분히 기회라고 느낄 수 있다. 1900년대 초반 활동한 인물을 재평가하면서, 2023년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떡하나. 적어도 그 시대 상황, 맥락은 살펴보고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 것 아닌가.”
-평생 독립운동을 연구한 역사학자로서 이번 논란을 어떻게 보나.
“일부 국민이나 국방부는 공산당 하면 김일성의 조선노동당만 떠올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시기의 공산당 개념은 이와는 다르다. 이론상으로는 양립이 불가능함에도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였던 분들도 계셨다. 이승만 전 대통령조차 임정대통령으로서 소비에트러시아에 임시정부 외무차장 이희경과 안공근을 파견했고, 1933년에는 모스크바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독립운동가마다 만들고자 한 나라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모두의 1차 목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를 이제 와서 ‘반공’이라는 잣대로 재평가한다면 군주제를 신봉한 의병이나 복벽주의자들,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를 표방한 독립운동가들은 또 어떻게 되나. 이들도 재평가해야 하는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분들이 남북이 분단될지, 이념으로 갈라질지 어떻게 알았겠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민족통합을 모색했고 임시정부 아래에서조차 좌우합작 등의 통합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이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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