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사랑해"라며 46억 상자를 보낸다고 했다[남기자의 체헐리즘]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직접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맘으로 현장을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가장자리에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200만원이요? 어디로 보내나요?"(기자)
"은행 : 하나은행, 계좌번호(3989**********), 이름 PHI*****. 여기로 돈을 보내시고 확인을 위해 전표를 보내주세요."
자칭 외교관이라는 '닥터 카터'란 자(者)가, 내게 인스타그램 DM으로 송금을 재촉했다. 그러면서 인천 본부 세관 사진을 보냈다.
대답을 안 하고 있으니 음성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200만원은 내게 너무 큰 돈이야. 난 매우 가난해."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얼마나 주실 수 있나요, 선생님."
다시 내가 분명한 액수를 대며 대답했다.
"1만원 정도입니다."
그러자 박사(기꾼)님께서 노하신듯 했다.
"농담하는 거야?"
나도 '맞팔'을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갑자기 DM(개인 메시지)이 오기 시작했다. 첫 마디가 이랬다.
"안녕, 얘야."
언제 봤다고 얘야라니. 굉장히 어색한 한국어였다. 번역기를 돌리는듯 했다. 당황하지 않고 나도 똑같이 답했다.
"안녕, 얘야."
그러자 Kimi가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 출신이며 우크라이나 야보리프에 있단다(안물). 유엔 평화유지군이라 했다. 내 이름과 직업을 묻기에, Ddol(똘이, 기자 반려견 이름)이며 농사를 짓는다고 둘러댔다.
"나는 독신 여성이자 고아입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어요. 결혼하셨나요? 저는 32살인데 몇 살이에요?"
그러면서 동시에 사진을 보냈다. 미군 군복을 입은 젊은 여성의 '셀카'였다. 외모를 보여주며 동정심을 함께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게도 미혼인지 물었다. 미혼이라 하니(실제는 유부초밥) 몇 년이나 됐냐, 기분은 어떠냐고 했다. 이리 대답했다.
"모태솔로 34년입니다. 너무 외로워서 방바닥만 긁어요. 나의 강아지가 나의 친구에요. 똘이라고 합니다. 똘이 알아요?"(기자)
"아, 네 개 좀 볼 수 있을까?"(Kimi)
그래서 똘이가 노란 달걀 옷을 물어 뜯는 사진을 보내주었다. 입기 싫어서 성났을 때 찍은 거였다. 그러자 "와, 너무 귀엽다. 톨리라는 달콤한 이름이 좋다"는 답변이 왔다. 맞춰서 대화도 하는 거였다.
그러더니 고양이를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은 영상을 보내왔다. 정말 우습게도, 본인 프로필 사진과 또 다른 여성 얼굴이었다.
소소한 대화들. "지금 뭐 하세요", "하루 잘 시작했나요"라고 먼저 물어오곤 했다. 자기가 있는 우크라이나는 끔찍하고 위험하단다.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인생의 꿈이 본인의 조부모를 찾는 거란다. 그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해줬다.
수일에 걸쳐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심지어 대답을 빨리할 수 없는 순간엔 "끝나고 문자를 보낼게"라고 하기도 했다. 운동 얘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내일 헬스장 가면 사진을 보여준다며(노땡큐).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럼없이 감정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온라인으로 만나 기뻐요."
"이름이 정말 사랑스러워요."(똘이야, 너 이름 예쁘대)
"당신이 34년 동안 싱글이었다고 말했을 때부터, 난 당신을 좋아했어요."(뭐래)
그러더니 어느샌가 내게 "여보"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 계속 사진을 보여달라 했다. 당신을 갈망한다나 뭐라나. 사진 원래 잘 안 찍는다고 주지 않았다. 찾아보니, 받은 사진으로 또 사기치려 요구하는 거란 의견이 많았다.
내용은 이랬다. 적군 공격으로 병사 16명이 죽고, 3명이 다쳤다고. 테러리스트 수용소에 들어가서 많은 돈을 가져왔단다(뭔 말이여). 어쨌거나 그게 350만 달러(한화 약 46억원)인데, 한국 사업에 투자하고 싶다고.
그러면서 100달러 뭉치가 가득 담긴 상자 영상을 보여줬다. 수익성 좋은 한국 벤처에 투자하도록 도와주면, 내게 45%를 준단다. 20억7000만원을 준단 거였다. 알겠다고 했더니 정보를 보내란다. 이름, 전화번호, 집 주소, 이메일 주소, 국가 등이었다.
그래서 아래 사진처럼 막 적어서 보냈다.
엉터리로 막 적어서 보냈는데, 맞는 주소인지 확인도 안 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배송을 했단다. 빠르게 보내려고 본인이 배송비 7500달러(약 999만원)를 지불했다고. 기밀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란다.
'외교관'이란 자에게 DM을 보냈다. 자칭 카터 박사. 우크라이나에서 보낸 돈 상자가, 벌써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단다. 그러더니 관세 200만원을 내라고 했다. 결제를 서두르라고.
통관에 200만원이 든단 얘기도 허무맹랑한데, 갑자기 사진 세 장이 왔다. 캐리어 두 개와 가방 하나. 그런데 이미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 놓여 있었다. 통관하는데 돈 달라면서, 이미 서울 지하철에 들어와 있는 사진이라니(하하).
1만원 밖에 없다고 했더니, 농담하느냐고 카터 박사께서 화났다. 돈이 진짜 없다고 했더니 150만원으로 깎아주는 아량을 베푸셨다. 그것도 없다고 했다. 실랑이가 이어지다 대화가 멈췄다.
이번엔 다시 Kimi란 자의 DM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돈이 두 배가 될 거다", "대출을 받아", "친구한테 빌려", "빨리 결제해" 등이었다. 돈 없다고 하니 이번엔 상자가 압수될 거라며 협박했다. 못 믿겠다고 했더니 "날 믿어 사랑", "여보 괜찮아" 등으로 회유했다. 시큰둥하니 "당신을 사랑한다", "날 못 믿느냐"며 애걸했다.
피해자 얘길 직접 들어봤다. 지난해 여름, 30대 여성 소영씨(가명)에게 DM이 왔다. "한국을 좋아하는데, 네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말을 걸고 싶었다"고 했다. 본인이 홍콩에 사는 사업가고, 이름은 Chen(첸)이며 29세라고 했다. 처음엔 가벼운 인사, 그 다음엔 좋아하는 음식, 운동, 취미. 영어로 대화한터라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진도 서로 주고 받았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팔로워가 1만명 정도 됐다. 일상 사진도 믿을만했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이어서 카카오톡으로 옮겨와 대화가 시작됐다.
"잘 잤어?", "뭐 해?", "하루 잘 보냈어?", "점심 먹었어?" 등의 평범한 안부를 묻는 말. 편두통 등으로 아플 땐 "약 먹었어?", "병원 다녀왔어", "아프지마"라고 위로하던 말.
소영씨는 저도 모르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어느샌가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털어놓았고, 귀 기울여 잘 들어주었다. 실은 그와 연락하기 두 달 전, 남자친구와 이별한터라 힘들었던 소영씨는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Chen이라는 자도 본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가난했고, 노점상부터 했고, 의류 사업을 했고, 지금의 성공에 이르렀단 식이었다. 솔직한 얘기가 오가니 벽이 더 허물어졌다.
두 달이 지날 무렵엔, 친구 관계를 넘은 대화가 오갔다. 그 무렵부터 본색이 드러났다. 투자 권유를 했다. 돈이 별로 없다고 하니, 소액이라도 괜찮다고 했다. 250만원을 투자했고, 예상하듯이 돌려 받을 수 없게 됐다. 남자는 잠적했다. 소영씨는 돈을 고스란히 잃었다. 그는 잃은 돈도 돈이지만,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다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깟 대화가 뭐라고, 저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 사람 부탁이라 어쩐지 거절할 수 없었고요."
무려 10년이 다 된 지금도, 왜 여전히 피해가 속출하는 걸까. 2021년 기준 로맨스스캠 피해 액수가 20억7000만원이란다(국가정보원 국제범죄정보센터). 심지어 늘고 있단다. 계속 알려주고 있는데, 왜일까.
SNS가 점점 더 위력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란 게, 전문가 분석이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예전 SNS 프로필이 외모 정도 보는 거였다면, 지금은 외모, 성실성, 능력,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심리학 용어로 '후광 효과'가 커졌다고.
그러니 SNS 프로필을 잘 만들고, 팔로워가 충분하면, '권위 효과'가 생겨 위력과 신뢰도가 높아지는 거다. 임 교수는 "신뢰도가 높아지면 경계심이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피해자가 점점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해결책으론 '법적 재재' 강화와 함께, 가족과 지인에게 알게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임 교수는 "혼자 해석하면 낙관적 편향(나한테만 운이 찾아올거란 식의 생각)을 갖게 된다. 편향을 줄이려면 주변 사람, 친구들에게 말해야 한다. 그들은 얘기해줄 수 있다"고 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피해 예방을 위한 기준점을 이렇게 잡으라고 했다.
"돈 보내달라고 하면 끝내는 겁니다. 상황 끝났구나, 그동안에 잘 놀았다, 안녕, 그러면 됩니다."
에필로그(epilogue).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얼마나 바보 같으면 속냐."
"이상한 여자들 참 많네."
로맨스스캠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 남 얘기라고 함부로 남긴 말들. 그게 어쩐지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이런 시선 때문에 피해를 입고도 신고도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이와 관련해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가 실험한 게 있다고 했다.
가짜로 대학교수 명함을 만들고, 방송사 자문이라고 넣었단다. 그리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단다.
관찰자일 땐 "누가 저런 거에 속아"라고 했던 사람들.
그러나 참여자가 되니 어떻게 됐을까.
지갑에 '현금'이 들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줬다고 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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