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고 거침없이…자의식이 빚어낸 조각들

한겨레 2023. 9. 9. 08: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S] 우진영의 한국 근현대 미술 잇기][한겨레S] 우진영의 한국근현대 미술 잇기
작가와 얼굴

권진규, 박물관에 자소상 팔고
죽기 직전 작품 보고 세상 떠나
권오상, ‘사진 조각’ 장르 개척
‘유희적 조형’ 자신감의 발현
권진규의 ‘가사를 걸친 자소상’(1969∼1970). 고려대학교 박물관 제공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미국의 유명 작가 폴 오스터는 자전적 소설인 ‘빵굽는 타자기’에서 작가의 삶이 필연적 ‘자기 선택’이라고 말한다. 여기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선택받은 두명의 조각가가 있다. 자신에게 몰두하는 성실한 ‘예술적 자아’와 ‘자기애’의 건강한 발현으로 고유함을 빚어내는 권진규와 권오상이다.

51살에 ‘다른 세계’ 건너간 자기 고백

‘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숨이 탁 하고 막혔다”라는 표현에 대해. 도판으로 ‘가사를 걸친 자소상’을 처음 보았다. 한쪽 어깨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의 흉상이다. 길게 뻗은 목을 강조하는 듯한 유려한 어깨선이 곡선의 부드러움을 살려낸다. 두 눈을 위로 뜬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진흙으로 형태를 빚고 구워내는 테라코타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흙빛을 그대로 두고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옷의 일부를 붉은색으로 덮어버렸다.

지난해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가사를 걸친 자소상’ 앞에 섰다. 어딘가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평온한 표정이다. 모든 것을 초월한 구도자가 내 앞에 있었다. 전시실은 붐볐지만 나와 자소상을 둘러싼 범접할 수 없는 경계막이 형성된 듯했다. 어느새 소음이 사라졌다. 고요하고 적막해졌다.

‘가사를 걸친 자소상’의 제작 연도는 1969년 또는 1970년으로 알려져 있다. 권진규는 1973년 1월 이 작품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팔았다. 그해 5월3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막 행사에 참석했고 이튿날 다시 전시실에 들러 작품을 살폈다. 죽음을 선택하기 몇시간 전이었다. 결말을 알고 다시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고통의 모든 단계를 지나 안도하고 있는 권진규가 보인다. 살아 있는 날들 안에서 나의 자아에 균열을 내야 한다면 기꺼이 다른 세계로 건너가겠다고. 처절한 자기 고백을 마주하니 더없이 아리다.

1950년대부터 꾸준히 제작된 권진규의 자소상은 정면을 응시한 채 턱은 들려 있다. 어깨 부분 이하를 과감하게 생략했고 주로 삭발의 형태다. 두상의 뒤가 뚫려 있기도 하다. 최소한의 형태만 남겼기에 얼굴과 눈빛에 더욱 시선이 간다. 50년대 작품에서 느껴지던 생기와 설핏한 듯 온화한 미소는 점차 사라져갔고 표정은 이내 무거워졌다. 70년대 자소상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다.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아니다. 솔직하게 내면의 나체를 드러내며 ‘나는 권진규다’라는 자의식이 보인다.

권진규는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웠다. 1953년 일본 최고의 공모전인 ‘이과전’에서 특선했다. 도쿄에서 권진규는 주목받았고 연인인 도모도 함께였다. 당시 사진 속 권진규는 밝게 웃고 있다. 좋은 시절이었다. 그는 안온함에 머물지 않았다. 1959년 홀로 귀국을 결심한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작업실을 손수 만들었다. 그는 알았을까. 힘겨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부푼 기대를 안고 귀국하는 그때의 권진규를 만나고 싶다. 다정한 응원의 말을 건네리라.

‘지원의 얼굴’, ‘마두’를 비롯한 여러 흉상과 동물상,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불상과 주문받고 제작한 그리스도상까지 모두 동선동 작업실에서 만들어졌다. 귀면, 토우, 기와, 잡상, 고구려 고분벽화 등을 모티프로 한 작품에서 한국의 전통미술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노트, 스케치, 사진에는 서양의 원시미술과 고대·중세·르네상스 등 다양한 미술을 연구한 흔적들도 보인다. 그가 그리고 꿈꿨던 예술세계는 넓고 무한했다.

흔한 ‘비운의 천재’ 공식에 권진규를 대입하고 싶지 않다. 그는 다만 ‘나로서 살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작업실을 옮겼을 뿐이다. 유한한 삶에서 영원으로. 웃고 있는 자소상을 굽는 권진규를 상상한다. 새로운 아틀리에의 층고도 높으면 좋겠다.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에스레터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한겨레신문을 정기구독해주세요. 클릭하시면 정기구독 신청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예고 진학 때부터 나는 작가”

권오상의 ‘추상적인 두상(AB)’(Abstract Head(AB)·2022)의 앞면.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사진 조각’이라는 단어에 권오상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이미 동시대 한국 현대미술을 잘 아는 사람이다. 2022년 ‘아트 부산’ 출장 때였다. 조금 지쳐 있었고 서류를 챙기며 터벅터벅 걸어가던 찰나에 눈이 번쩍 뜨였다. 발걸음을 멈추고 작품명에 눈을 맞췄다. 권오상의 ‘추상적인 두상(AB)’(Abstract Head(AB))이었다.

‘이 비범함은 뭐지?’ 크지 않은 두상 조각에 압도당했다. 조각임이 분명한데 조금 이상하다. 인쇄된 사진들이 이어져 붙어 있다. 분열되고 부서진 듯 보이는 인물의 표정에 묘하게 이끌렸다. 알 수 없음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낸다.

권오상의 ‘추상적인 두상(AB)’(Abstract Head(AB)·2022)의 뒷면.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가벼운 조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권오상이 홍익대학교 조소과 시절 사진을 이용한 조각을 처음 시도한 이유를 요약하면 이렇다. 2001년 열린 권오상의 첫 개인전은 ‘사진 조각’이라는 장르의 탄생을 미술계에 알렸다. 모든 새로움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권오상은 통했다. 그는 국내외의 유명 미술관과 갤러리 전시에 지속적으로 초청을 받았다. 무명 시절 없는 예술가다.

‘추상적인 두상’은 권오상의 ‘버스츠’(Busts) 시리즈 중 하나다. 다각도에서 촬영한 실제 인물 및 동물의 사진을 인화한 뒤 흉상 위에 이어 붙인다. 분절돼 있는 사진 조각들이 융합하며 만들어내는 기이함에 혼란스럽고 어지럽지만 계속 눈이 간다. 조각나고 파편화된 사진들이 이어지고 뒤틀리면서 구상이었던 작품의 형태가 추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직감이 왔다. 이 유희적인 조형 미학은 예술가의 흔들림 없는 자아에서 오는 거라고. “예고에 진학했을 때부터 나는 작가라고 정의했다.” 권오상의 인터뷰를 보고 나의 예측이 맞음을 알았다. 권오상의 작품에서 보이는 ‘거침없음’의 미학에 통쾌해졌다.

작품의 정면을 살펴보면 어긋나 있는 두상과 다른 높이에 있는 눈동자가 슬퍼 보인다. 반쯤 벌어진 입은 간절함이 담긴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다. 뒷모습은 또 다르다. 흐트러짐 없이 빗겨진 머릿결에 보석이 박힌 듯한 세련된 블랙 장식으로 치장한 목덜미는 단정하고 매끈하다. 사람은 누구나 입체적이다. 나약함 속에 강함이 있고 화려함 안에 초라함이 존재한다. 대상물을 360도로 돌려가며 사진을 찍고 다시 이어 붙이는 그의 ‘사진 조각’이 인간의 기본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과한 비평적 해석일까.

‘데오도란트 타입’, ‘더 플랫’, ‘더 스컬프처’, ‘뉴 스트럭처’ 등 권오상은 여러 시리즈를 선보이며 슈퍼카와 셀레브리티, 고양이와 악기, 작가 본인의 자녀들까지 수많은 인물과 사물을 과감하게 변주하고 있다. 그가 생성해내는 확장과 새로움에 신이 난다.

언제나 먼저 용기 내고 그 용기에 거짓 없는 예술가들이 있다.이번 글을 쓰며 권진규를 떠올릴 때면 자주 마음이 아팠고 권오상을 생각하면 진실로 기꺼웠다.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를 편히 감상할 수 있음이 죄스럽고 감사하다. “사는 동안 계속 작업을 하고 싶다. 역사에 남으면 더 좋겠다.” 조각가 권오상의 바람을 들으며 권진규의 조카 허명회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젊은 세대들이 권진규를 넘어서길 바랍니다.” 가슴이 미어져 온다. 성실하게 자아를 지켜내는 모든 예술가에게 찬사를. 유난히 뜨거웠던 계절이 지나간다. 이제 바람이 분다.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