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은섬] '섬티아고', 나에게로 가는 순례자의 길
노둣길 건너 건축미 뛰어난 작은 예배당 12곳 만나
[편집자주] 전남도가 2015년부터 역점적으로 추진했던 '가고 싶은 섬' 사업. 풍광, 생태, 역사, 문화자원이 풍부한 전남의 섬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섬 정주여건을 개선하자는 차원에서 시작됐다. <뉴스1>이 가고 싶은 섬 사업을 통해 특색있고 매력적인 생태관광지로 탈바꿈한 전남의 주요 섬을 직접 찾아 그곳만의 매력을 들춰봤다.
(신안=뉴스1) 김태성 기자 = 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속한 섬인 기점도와 소악도에 가면 '섬티아고' 순례길이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빗대 이름 붙인 곳으로 점차 알려지면서 외딴 섬에서 사색과 힐링의 시간을 갖기 위해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배를 타고 들어가 섬과 섬을 잇는 노둣길을 건너고 12㎞를 걸으면서 특색 있는 건축미술품인 작은 예배당 12곳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다소 멀고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도시의 삶을 떠나 바다와 갯벌, 예배당을 둘러보며 치유와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면서도 의미가 있다.
예배당은 섬마다 퍼져있지만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걸으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다보면 자연과 물아일체도 느끼고 힘들지만 자기도 모르게 위안을 받게 된다.
섬티아고 순례길을 가려면 목포에서 압해대교를 지나 신안 송공항에서 배를 타야 한다. 대기점도까지 60분, 소악도까지는 40분이 소요되며, 페리가 1일 4회 운항한다. 당일 코스로는 오전 9시30분 배를 타고 들어가 오후 4시30분 배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차를 배에 실어 갈 수도 있지만 섬 주민들이 차로 오지 않기를 권장하는데다 순례길의 의미상 자연과 벗 삼아 걷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차를 송공항에 두고 배에 올랐다.
배는 신안의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긴 다리인 '천사대교' 아래를 지나가고, 바다 위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이 다리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섬 방문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밝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포즈를 잡느라 분주하다.
빨간 지붕의 집들이 인상적인 당사도를 거쳐 페리는 40여분만에 소악도에 도착했다.
섬티아고 순례길은 대기점도 선착장에 내려서 둥글고 푸른 지붕의 그리스 산토리니풍 건물을 연상케 하는 건강의 집(베드로·1번째)부터 출발을 알리는 종을 치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걷기가 부담스러우면 이곳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섬을 둘러볼 수도 있다.
예배당들은 걸어서 20분가량 거리를 두고 섬 곳곳에 위치에 있다. 대기점도에 5곳, 소기점도에 2곳,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 노둣길에 1곳, 소악도에 1곳 진섬에 2곳, 딴섬에 1곳이 있다.
하지만 걸어서 12곳 모두를 둘러보려면 썰물 때에 맞춰 노둣길을 건너야 하는 사정 때문에 필자는 소악도에서 내려 걷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순서로 따지자면 거꾸로 걷는 셈이다.
노둣길은 섬과 섬을 이어주는 작은 길로 밀물 때는 사라져버리지만 썰물 때는 나타나는 길이다. 진섬에서 소악도, 소기점도, 대기점도, 병풍도까지 4개의 노둣길이 섬들을 잇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교통이 불편한 섬사람들의 애환과 소망을 보여주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악도에 내리니 유네스코 세계유산(생물권보전지역) 상징물이 서 있고, 화분이 걸린 벽에 '방랑자에서 순례자로(from bagabond to pilgrim)'라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섬 앞쪽은 썰물 때여서인지 작은 배 한 척이 좁은 물길이 난 넓은 갯벌 위에 놓여있고, 바다는 멀리 물러난 서양화 같은 항구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소악도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예배당은 칭찬의 집(유다 타대오·10번째)이다. 하얀 뾰족지붕과 파란색 문과 작은 창문이 인상적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사각형 창틀에 앙증맞은 작은 천사 인형이 놓여있고, 푸른 문양의 타일 바닥에 앉아 기도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새우 양식장 옆 빨간 지붕의 쉼터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진섬 솔숲 해변에 사랑의 집(시몬·11번째)이 있다. 꼭대기에 핑크빛 하트에 그려진 감긴 눈동자가 휴식을 연상케 하며, 소나무 앞 벤치에 앉아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바다를 배경으로 셔터를 눌러대는 방문객들이 삼삼오오 눈에 띈다.
작은 오솔길을 지나면 물이 빠진 무인도인 딴섬 언덕 위에 지혜의 집(가롯 유다·12번째)이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벽돌의 뾰족지붕 예배당으로 순례를 마치면서 울리는 종이 있다. 이곳은 밀물 때는 들어올 수 없어 물때를 잘 맞춰야 한다.
소원의 집(야고보·9번째)은 소악도 둑길 끝에 있으며, 프로방스풍 오두막을 연상케 하는 소박한 건축물이다. 곡선과 물고기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들어온다.
길을 재촉하며 걷다 보면 순례길 중간지점에 있는 빨간 지붕의 교회를 만난다. 소악교회다. 입구에는 1년에 고무신 9켤레가 닳도록 섬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문준경 전도사를 소개하는 글과 함께 그녀가 신고 다녔던 흰 고무신과 보따리가 위에 놓여있는 추모비가 서 있다. 잔디가 깔린 교회 앞뜰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곳 건물 일부는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며 방문객들을 위한 휴식 공간이기도 하다.
기쁨의 집(마태오·8번째)은 소기점도 노둣길 갯벌 위에 지어져 있으며, 3개의 황금빛 둥근 지붕이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연상케한다. 섬 특산물인 양파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물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실내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인연의 집(토마스·7번)은 소기점도 게스트하우스 뒤쪽 순례길에 위치해 있으며, 흰색과 파란색 문이 조화를 이룬다.
소기점도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6번)은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와 철제 구조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잔잔한 물에 비친 모습이 인상적이다.
길 따라 예배당을 찾아 걷는 것을 잠시 멈추고 햇볕을 피해 근처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니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걷다보면 12㎞가 만만치 않아 만나는 사람들마다 수고한다는 인사를 건넨다.
광주에서 왔다는 한 방문객은 "예배당마다 특색이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면서 "순례길과 건축물에 대한 배경 설명을 자세히 해주면 더욱 유익할 것 같다"고 주문했다.
다시 길을 나서 소기점도 노둣길 입구에 서 있는 행복의 집(필립·5번)으로 간다. 적벽돌과 갯돌로 이뤄진 삼각형 정면에 유리로 된 긴 십자가가 설치돼 있고, 물고기 비늘 같은 나무 지붕이 독특하다.
대기점도 남촌마을 팔각정 근처에 있는 생명평화의 집(요한·4번)은 외곽이 단정한 원형모양으로 긴 창이 나 있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다. 입구에는 가우디 작품을 연상케 하는 염소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예배당 부지는 소유주로부터 기증받았는데, 건축자의 배려로 바람 창을 통해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 무덤이 보이도록 배치돼 애틋함을 느끼게 한다.
대기점도 큰 연못을 지나 숲 근처에 있는 그리움의 집(야고보·3번)은 붉은 기와와 나무 기둥, 출입문에 거울이 있는 오두막집이다. 내부 벽화가 에밀레종 부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북촌마을 동산에 있는 생각하는 집(안드레아·2번)은 흰 건물과 에메랄드빛 지붕 위 고양이 형상과 입구에 선 파란 눈의 고양이상이 이채롭다. 길을 가다 보니 이 마을에는 고양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여기서 보면 병풍도로 가는 노둣길이 보이고 구름 떠 있는 바다 풍경이 시원스럽다. 근처에 민박과 작은 커피숍, 정자 등이 있어 머무르거나 쉬어갈 수 있다.
소기점도에서 걸어서 대기점도 선착장에 이르렀다. 둥글고 푸른 지붕의 그리스 산토리니 풍의 건강의 집(베드로·1번)이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다.
좁은 내부에는 의자가 놓여있고 벽에는 수채화 같은 꽃그림이 그려져 있다.
소악도에서부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12곳 예배당을 둘러보는데 휴식시간 포함, 장장 5시간이 소요됐다. 힘들었지만 해냈다는 뿌듯함도 생기고, 걷기를 통해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섬티아고' 순례길은 어떻게 조성됐을까.
신안군 증도면 병풍리 기점·소악도는 2022년 말 인구가 83명에 불과한 섬으로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지역소멸 위험을 안고 있던 섬이었다.
지난 2017년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에 선정됐고, 경남 통영시 동피랑 벽화마을 조성을 주도한 윤미숙 씨(전남도 섬 전문위원)가 건축미술 순례길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갯벌뿐인 섬 가꾸기가 막막했으나 썰물 때면 나타나는 노둣길이 모세의 기적에 비유되고 섬 주민 90%가 교회에 다닌다는 점에 착안해 예수의 12사도 명칭을 딴 순례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순례자의 섬' 조성을 위해 도·군비 45억여원을 들여 2021년까지 순례길 12㎞와 12사도 작은 예배당, 복합센터, 브랜드·환경 디자인, 크린하우스 무인카페 겸 쉼터, 노둣길 복원, 유채·수국 경관단지 조성 등을 추진했다.
김윤환, 이원석, 박영균, 손민아, 강영민, 김강 등 국내 유명작가 6명과 요라이 아브라함 슈발, 브루노 프루네 등 외국 작가 4명이 1년간 섬에 거주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예배당 건축물과 순례길을 만드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5개의 섬 주민들이 각자 섬에 게스트하우스 등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였기 때문이다. 의견 조정이 불가능해 사업취소가 잠정 결정되기도 했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섬 대표주민들을 군수실로 불러 의견 통일될 때까지 집에 갈 수 없다며 배수진을 쳐서 합의점을 도출했으며, 결국 참석자 모두가 서약서에 서명했다.
건축물을 설치할 전망 좋은 토지 확보도 쉽지 않았다. 군은 토지 주인들을 개별 면담을 통해 꾸준히 설득하고, 다른 토지와 교환, 군 보조사업 우선지원 등을 약속하며 실마리를 풀었다.
12개의 작은 예배당 건축도 박 군수가 직원들과 고민 끝에 ‘예술품으로 보자’고 합의하고 미술품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3∼4개를 우선 짓고 예산을 지불하는 과정을 통해 순차적으로 완성했다.
2번 예배당은 섬에서 구할 수 있는 절구 등을 작품에 활용했으며, 10번 예배당은 폐어구들이 쌓여 악취가 심한 쓰레기장이었지만 건물 설치로 주변이 깔끔하게 정비돼 섬 환경개선 효과도 거뒀다.
이 같은 군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섬 경관과 조화를 이룬 12개의 건축물을 찾아 작품의 특성도 느껴보고 갯벌과 바다 풍광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섬티아고' 순례길이 탄생했다.
그 결과 2018년 2965명이었던 관광객이 2020년 2만8546명, 2021년에는 5만3846명으로 약 20배 증가하고 주민소득도 향상됐다.
오랫동안 찾지도 않은 외딴섬에 기적같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고향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는 희망의 섬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기도, 휴식, 명상을 할 수 있는 평화로운 장소, 12개의 아름다운 건축미술 작품을 보며 걸어보자. 그리고 기도해본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hancut0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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