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암소와 백신의 탄생…감염병 원인 찾는 여정(2)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2023. 9.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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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소록도병원 확장공사. 한센인권활동백서 제공

● 감염병 해결을 위한 나름의 방법

감염병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하면서 수시로 인류를 위협해 왔다.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던 시기에 인류가 취한 방법은 격리, 소망, 옷 등이 있다.

13세기에 유럽에서 한센병이 유행하자 경험적으로 한센병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하는 병이라 생각한 이들은 환자를 마을에서 쫓아냈다. 비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마을에서 쫓겨난 환자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약자를 보호하려는 기독교 박애정신을 가진 성직자와 신도들은 그들을 찾아가 돌봐주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소록도 등 우리나라 곳곳에 한센병 환자를 모여살게 한 것도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키는 방법의 하나였다. 역사적으로 16세기 초에 유럽에서 매독 환자들이 유행할 때 환자를 마을에서 쫓아낸 것이나 14세기에 유럽에서 페스트가 유행할 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은 것은 스스로 격리를 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페스트가 유행할 때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가 쓴 '데카메론(Decameron)'은 페스트를 피하여 피에솔레에 있는 별장에 모인 남자 3명, 여자 7명이 하루에 한 명씩 100일간 하는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이들이 마을을 떠나 조용한 시골로 간 것도 격리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책에서 당시 사람들이 페스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으므로 의학역사학자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비엔나 페스트 탑(왼쪽), 프라하 페스트 탑(오른쪽). 위키미디어 제공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린츠, 필슨, 체코 프라하 등에는 페스트 탑이 있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도 페스트와 관련된 기념물이 있다. 

설명을 보면 “페스트가 물러갔음을 기념하여 탑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도 중국과 몽고의 국경 부근에서 페스트 환자가 가끔씩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에서 볼 수 있듯이 감염병은 물러간 후에도 언제든 다시 유행할 수 있으므로 “물러갔음을 기념”하기보다는 “물러가기를 소망”하여 건립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지식과 정보가 부족했지만 감염병이 무섭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보호를 받으려 했다. 페스트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 등은 새 부리 모양을 한 특이한 가면과 비교적 두꺼워보이는 옷을 입었고 19세기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는 수많은 악세서리를 부착한 옷을 입었다. 

각각의 옷이 왜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붙이기는 했지만 현대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아무 효과도 없는 엉뚱한 행위에 불과했다. 

흑사병 의사의 복장(왼쪽), 19세기 영국의 콜레라 예방 복장(오른쪽). 위키미디어 제공

이와 같이 격리, 소망, 옷 등을 이용하여 감염병으로부터 해방되려 했으나 실제 효과는 미미했으며 지난 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19세기 초에 위생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감염병 예방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백신 개발 전에 알려진 감염병 예방법 

19세기까지 의학발전이 병에 걸린 사람들의 치료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만큼 획기적이지 않았지만 수술법은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총을 사용하면서 상처가 커져 피해를 입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1840년대가 되자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이 마취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수술이 한결 쉬워졌다.

수술 빈도가 많아지자 낫는 병도 많아졌지만 수술후 합병증에 의해 사망하는 이들이 많아진 게 문제였다. 또 아기를 낳은 산모가 분만 후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초기 소독법의 초기 선구자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위키미디어 제공

1818년에 헝가리에서 태어난 제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818~1865)는 페스트 대(그 때는 부다와 페스트가 합쳐져 부다페스트가 되기 전이었다)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유학을 간 후 법 대신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피를 배지삼아 미생물이 마구 자라는 패혈증이 수술시 가장 문제가 되던 1840년대 말 비엔나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근무하던 제멜바이스는 두 병동의 분만실 중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의사들이 근무하는 병원보다 교육 대신 경험을 토대로 근무하는 조산사들이 일하는 병동에서 분만 후 산모들의 사망률이 훨씬 낮은 걸 발견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 제멜바이스는 의사들이 다른 일을 하다가 그냥 분만실로 들어오는 걸 발견하고 의사들이 분만실로 들어올 때는 소지한 장비와 손을 비누와 염소로 씻고 오도록 조치했다. 그러자 이 조치를 위한 1848년에 조산사들이 일하는 병원보다 처음으로 산욕열에 의한 사망률이 낮아졌다.

1850년에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페스트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면서 그동안 연구와 경험을 토대로 1861년에 산욕열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소독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책 'The etiology, concept, and prophylaxis of childbed fever(산욕열의 원인, 개념과 예방)'을 발행하여 유럽의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유럽의 산부인과 의사들은 이를 무시했고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이 무시당하자 성격도 변해 갔다. 친구들은 1865년에 그를 정신병 환자 수용소로 보냈고 불과 2주일만에 손가락 상처에 의한 봉와직염이 패혈증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사망하고 말았다.

한편 1960년부터 글래스고대 외과교수로 일한 영국의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는 미생물이 감염병의 원인이라는 파스퇴르의 연구를 알게 되었다. 

수술 후 발생하는 이차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그는 패혈증이 사람의 몸에 해를 일으키는 미생물이 많이 자라나 의사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에 이른 상태라는 착상을 떠올렸다. 그래서 수술시 발생하는 상처가 미생물에 감염되는 것을 막을 방법을 찾고자 했다.

리스터는 우연히 목장에서 가축이 원인 모르게 죽어가는 사고가 발생하자 하수로에 석탄산(페놀)을 흘려보내자 가축의 사망률이 감소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가축의 병은 세균이 원인이고 석탄산은 세균 감염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하여 1865년에 수술후 환자들이 상처에 석탄산을 바르는 실험을 통해 석탄산이 2차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석탄산은 피부에 닿으면 자극효과가 강하므로 리스터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수술실을 석탄산으로 소독하면 수술후 발생하는 2차 감염을 크게 줄일 수 있음도 알아냈다. 이를 무균처리법이라 한다.

리스터의 발견도 초기에는 제멜바이스의 주장처럼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리스터는 굴하지 않고 소독법을 계속 연구하여 방법을 개선하고 패혈증 발생 빈도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1840년대에 마취제가 발견되었고 1860년대에는 이차감염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무균처리법이 개발됨으로써 수술은 크게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수술법의 발전은 이차감염이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이 파스퇴르. 위키미디어 제공

● 농민을 도와 주는 과정에서 화학자 파스퇴르가 의학역사를 빛낸 인물이 되다 

의사가 아니면서 의학발전에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한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1848년에 주석산 결정의 선광성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1854년부터 릴레대에서 화학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1856년에 주변에서 포도주 생산업을 하던 양조업자들이 포도주 생산 과정에서 쉽게 부패하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연구결과 포도주가 잘 만들어지는 경우는 효모가 발효되는 과정이고 젖산균을 비롯한 세균이 오염되는 경우는 부패함을 알아냈다.

그는 1861년에 백조 목 모양의 플라스크를 이용한 실험으로 생물이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자연발생설이 잘못된 이론임을 증명했다. 또 우유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열처리를 할 때 끓이면 단백질 침전이 생겨 식감이 좋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63년에 저온살균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상이 미생물과 관련된 내용이며, 이후로 닭콜레라, 탄저병, 광견병 백신을 개발함으로써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의한 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예방접종의 원리는 1796년에 영국의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처음 발견했지만 이를 토대로 예방접종의 원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여러 방법으로 예방법을 개발할 수 있음을 보여 준 후 이 방법에 대해 백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파스퇴르가 한 일이었다.

제너가 두창(천연두)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두창과 유사하여 두창에 대한 면역력을 키울 수 있으면서도 증상이 약한 우두라고 하는 감염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 후로 발견되지 않을 만큼 특이한 경우였으므로 파스퇴르가 백신을 개발하고자 할 때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에 걸린 닭의 벼슬에서 피를 채취하여 닭고기 수프에 이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 수프를 실온에 수일 방치해 두자 수프에서 세균이 아주 많이 자라났다. 이 수프를 빵에 떨어뜨린 후 닭에게 주자 닭 콜레라가 발생하여 죽어 버렸다. 현미경으로 관찰한 세균이 닭 콜레라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1880년에 이 실험을 반복한 파스퇴르는 닭고기 수프를 방치해 두는 시간이 길어지면 닭이 죽지 않고 병을 앓다가 회복됨을 발견했다. 방치해 둔 수일간 세균이 병을 일으키는 능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를 응용하여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 예방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파스퇴르는 제너가 암소를 이용한 것에 착안하여 라틴어로 암소를 뜻하는 vacca를 이용하여 자신이 고안한 방법을 예방접종법(vaccination), 이 때 사용하는 재료를 백신(vaccine)이라 이름붙였다.

이듬해에는 비슷한 방법으로 사람에서는 흔치 않지만 소와 양 등에서 문제가 되고 있던 탄저병 예방백신 개발에 뛰어들어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고 1885년에는 자신이 개발한 광견병 백신이 예방은 물론 치료에도 효과를 지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감염병은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그 후로 수많은 학자들이 감염병을 해결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뛰어드는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로베르트 코흐. 위키미디어 제공

● 감염병의 원인은 현미경으로만 관찰가능한 작은 세균임을 증명한 코흐

프랑스에서 파스퇴르가 미생물의 존재를 눈치채고 이에 의한 감염병 해결용 백신을 제조하고 있을 때 독일에서는 코흐(Robert Koch, 1843~1910)가 감염병의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임을 증명했다.

1843년 현재의 독일인 프러시아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난 코흐는 괴팅겐 의대를 졸업했다. 졸업 직후 세포병리학의 창시자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의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기도 했으나 도전과 모험정신이 강했던 그는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을 자청하여 참전하기도 했다. 

참고로 프랑스와 독일의 보불전쟁은 양국의 적대 감정이 고조되어 코흐와 파스퇴르를 필두로 한 의학계의 경쟁에서도 큰 라이벌 의식을 발휘함으로써 의학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빨리 끝났고 10대 시절 첫사랑에게 작은 도시에서 조용한 개업의사로 살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다. 성격에 맞지 않는 생활에 따분함을 느끼던 그를 불쌍히 여긴 아내는 새로 나온 기계인 현미경을 선물했다. 

다른 나라보다 현미경을 이용한 발전이 빨랐던 독일에서는 1838년에 슐라이덴이 식물은 세포로 되어 있음을 발견했고 1839년에 슈반이 동물도 세포로 되어 있음을 발견했으며 1858년에 피르호는 사람의 병이 세포의 이상에서 기인한다는 내용을 담은 '세포병리학' 책을 발표함으로써 세포병리학이 시작되는 계기를 이룬 상태였다. 이렇게 독일에서 중요한 발견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아내가 사다 둔 현미경은 코흐의 인생도 바꿔 놓았다.

1870년대에 유행하던 탄저병 연구에 뛰어든 그는 탄저병에 걸린 쥐의 피에 길쭉한 모양의 미생물이 존재함을 발견했다. 그는 한 종류의 새균만을 순수배양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했으며 특정 세균이 특정 감염병의 원인임을 증명하려면 아래 네 가지 원칙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병원균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동물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2. 병원균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동물로부터 배양되고 순수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3. 분리된 병원균을 건강한 실험동물에 접종하면 동일한 질병을 일으켜야 한다.
4. 실험적으로 감염시킨 동물로부터 동일한 병원균이 다시 분리 배양되어야 한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그는 1876년 탄저병, 1882년 결핵, 1883년 콜레라의 원인이 되는 세균을 발견했다. 또한 그의 4원칙을 따른 학자들이 이 원칙을 이용하여 다른 감염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코흐의 학자로서의 능력을 인정한 정부는 베를린에 1891년 7월 1일 전염병연구소(Royal Prussian Institute for Infectious Diseases)를 설립하여 코흐를 소장으로 임명했다.

이 연구소는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와 더불어 전 세계의 연구자들이 모여드는 의학의 중심지가 되었고 1912년에 결핵균 발견 30주년을 맞이하여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결핵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년까지 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한 코흐는 1905년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1910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소장으로 근무한 연구소 이름이 자신의 이름으로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다.

※ 참고문헌

1. David Greenwood. Antimicrobial Drugs: Chronicle of a twentieth century medical triumph.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2. 폴 드 크루이프. 미생물 사냥꾼. 이미리나 역. 반니. 2017
3. 예병일. 의학사 노트. 한울엠플러스. 2017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교수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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