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기를 손에 든 좀비들···‘마약계 연쇄살인마’ 펜타닐, 문 앞까지 성큼[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3. 9. 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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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계의 연쇄살인마’ 펜타닐
마약성 진통제로 전 세계 마약시장 ‘평정’
중국 당국 묵인 속 생산·유통 현장 탐사보도
제약사, 미·중까지 얽힌 ‘마약 산업’ 현주소
·
한국도 더이상 ‘마약 안전지대’ 아냐
펜타닐 등 합성마약 젊은층 중심으로 확산
마약성 진통제 얻기 위해 ‘뚫린 병원’ 찾는 중독자
독재 이후 현정부까지 정치 악용된 ‘단속 역사’
미국 필라델피아 켄싱턴의 좀비 거리. 히포크라테스 제공

펜타닐

벤 웨스트호프 지음·장정문 옮김|소우주|444쪽|2만원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

양성관 지음|히포크라테스|368쪽|1만8000원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몸을 축 늘어뜨린 채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이 마치 좀비 같다. 주사기를 손에 든 좀비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켄싱턴은 마약중독자들이 몰려들어 ‘좀비 거리’로 불린다. 이들이 사용하는 마약은 코카인, 헤로인, 대마 같은 ‘전통적’인 마약이 아니다. 최근 마약의 주도권은 펜타닐에 넘어갔다. 극소량만으로도 강력한 효과를 볼 수 있으며 제조와 유통이 쉽고 가격이 싸 마약중독자들 사이에 애용된다. 효과가 센 만큼 결과도 치명적이다. 치사량이 2㎎에 불과해 자칫하다가는 과다복용으로 호흡이 멈춰 죽음에 이를 수 있다. 펜타닐로 미국에서 해마다 7만명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마약계의 연쇄 살인마”다.

펜타닐은 우리에게도 낯선 이름이 아니다.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서래가 살인에 사용하는 독극물이 펜타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고등래퍼> 출신 윤병호(불리다바스타드)가 마약 투약 및 매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이슈가 됐는데, 그가 매수한 마약이 펜타닐이다. 펜타닐은 청소년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지난 6월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 청소년 10.4%가 몸에 붙이는 형태의 펜타닐 패치를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여겨졌던 한국 사회에도 마약의 위협이 커지고 있다. 다크웹을 통해 거래되며 우편으로 집 앞에 편리하게 배송되는 마약에 더 이상 국경은 없다.

각종 불순물이 섞인 비위생적인 마약. 히포크라테스 제공

미국과 한국에서 마약의 실태를 다룬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펜타닐>은 미국의 탐사보도 저널리스트인 벤 웨스트호프가 펜타닐의 생산과 유통, 사용 과정을 추적해 쓴 책이다. 2010년대 초반 미국에서 펜타닐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진 펜타닐의 사용자와 생산자, 유통망을 광범위하게 취재했다. 160여 명을 인터뷰하고 중국의 펜타닐 생산공장과 영업 사무실에 잠입 취재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약의 역사, 거대 제약사의 이윤 창출과 중국의 경제성장을 떠받친 마약산업, 펜타닐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정치적 갈등까지 다룬다.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양성관이 쓴 책이다. 병원을 돌아다니며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아 상습적으로 복용하는 중독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마약 생산·유통·판매·소비의 고리를 설명한다. 진료실에서 만난 중독자들의 실태를 다룬 현장 보고서이자 한국의 마약 단속과 마약사범의 변동 추이를 살피면서 ‘마약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국내 의사로서는 최초로 펴낸 마약 분석서다. <펜타닐>에 서술된 국제적 마약 생산·유통·소비의 흐름 속에 한국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몸에 붙이는 펜타닐 패치(왼쪽)와 입 안에서 녹여 먹는 막대사탕 형태의 펜타닐 액틱정(오른쪽). 히포크라테스 제공
‘수술실의 혁명’에서 ‘치명적 독극물’로

아편이 그랬듯 펜타닐도 처음엔 마약이 아닌 진통제였다. 펜타닐은 극심한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 암 환자나 수술 환자에게 사용된다. 양성관도 말기암 환자에게 펜타닐을 처방한 적이 있다. 펜타닐은 유명한 제약회사 이름이기도 한 화학자 폴 얀센에서 비롯한다. 진통제 모르핀의 대안을 찾고자 했던 얀센은 1959년 처음 펜타닐을 합성했고, ‘수술실의 혁명’으로 여겨졌다. “펜타닐 덕분에 처음으로 장시간 수술이 가능해졌다. 펜타닐과 그 유사체인 수펜타닐이 없었다면 개심 수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펜타닐은 효과가 더 빠르고, 훨씬 강력하고, 메스꺼움을 유발할 가능성이 적었다. 하지만 개발 초기부터 잠재적 중독 위험성이 제기됐다. 통증 완화 효과는 뛰어났지만, 남용하기 쉽고 단기간에 의존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펜타닐은 얀센에 큰 수익을 가져다줬지만 마약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를 불러온 ‘치명적 독극물’이 되었다. 2016년 사망한 가수 프린스의 목숨을 빼앗아간 것도 펜타닐이 함유된 위조 알약이었고 톰 페티, 래퍼 릴 핍 등 음악계 스타들도 펜타닐로 목숨을 잃었다. 2015년 스웨덴에선 펜타닐과 그 유사체가 헤로인을 제치고 가장 위험한 마약이 되었으며, 2018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역시 펜타닐을 미국에서 가장 치명적인 마약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왜? 펜타닐이 ‘연쇄 살인범’이 된 데는 마약의 역사, 중국의 화학산업 등이 연관돼 있다. 대마초, 코카인, 헤로인, LSD, 엑스터시 등 기존 약물이 불법화되고 단속 대상이 되면서 실험실에서 손쉽게 만드는 합성마약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펜타닐은 손쉽게 분자 구조를 바꿔 유사체를 만들 수 있었다. 극소량만으로도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으니 유통하기가 쉬웠다. 펜타닐은 헤로인의 200분의 1에서 300분의 1 용량으로 같은 효과를 낸다. 한 줌의 가루로 몇천명분의 펜타닐 생산이 가능했다. 마약상들에겐 희소식이었지만, 중독자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펜타닐은 극소량만으로도 치사량에 이를 수 있지만 업자들은 눈대중으로 펜타닐을 계량해 코카인 등과 섞은 마약을 만들어냈다. “길거리에서 판매되는 분말과 알약에 순수 펜타닐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 용량에 대한 정보 부족이 펜타닐 과다복용 사태의 근본적 원인이다.” 이번 약을 먹고는 무사했을지라도, 다음 약을 먹고도 무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펜타닐 복용은 “러시안룰렛”이 됐다.

캔디 모양의 엑스터시. 히포크라테스 제공
‘펜타닐 공장’ 중국···미중의 ‘신 아편전쟁’

중국은 세계의 ‘펜타닐 공장’이 됐다. 신종 마약 대부분은 중국의 실험실에서 제조된다. 척 슈머 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중국이 전 세계 불법 펜타닐의 90% 이상을 생산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강력한 규제로 펜타닐 및 그와 유사한 화학물질을 불법화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등에서 불법인 화학물질이 중국에선 여전히 합법인 경우가 많다. 펜타닐 합성에 필수적인 전구체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생산되고 세계 각지로 판매된다. 대부분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화학공장’에서 실험복을 입고 고글을 쓴 화학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웨스트호프는 다크웹을 통해 접촉한 중국 펜타닐 생산업체에 잠입해 취재하기도 했다.

중국 우한은 ‘코로나19의 진원지’로 유명하지만, 펜타닐 전구체의 주요 생산지이기도 하다. 웨스트호프는 우한에 있는 펜타닐 전구체를 생산하는 회사를 방문한다. 이곳에선 각종 합성 마약, 불법 스테로이드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중국 당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한 결과 2019년 중국은 모든 펜타닐 유사체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펜타닐 전구체는 불법이 아니다. 펜타닐 전구체 생산업체는 첨단 신기술 사업으로 선정돼 세금 우대 혜택을 받기도 했다. 2023년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요 의제 중 하나로 펜타닐 생산 원료물질의 미국 유입을 막기 위한 협력이 논의될 만큼 펜타닐은 미·중 갈등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신아편전쟁’인 셈이다.

“세계 양대 초강대국은 오피오이드(합성 진통제, 주로 펜타닐)를 톤 단위로 생산하고 있다. 미국은 대개 합법적인 의약품으로, 중국은 불법적인 마약으로 생산하고 있지만, 각국의 피해는 서로에게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다. 두 강대국이 서로를 비난하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 이 유행병은 전 세계로 계속 확산되고 있다.”

메스암페타민(필로폰). 결정이 얼음같이 투명하다고 해서 얼음, 아이스, 트리스털, 빙두 등으로 불린다. 북한은 빙두를 제약공장에서 생산해 수출한다. 히포크라테스 제공
정치적 목적의 ‘마약과의 전쟁’···한국, 마약 생산국에서 소비국으로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에 등장하는 중독자들은 병원을 돌며 마약성 진통제를 찾는다. 이들이 처음 마약성 진통제를 접한 건 치료 목적이다. 급성 췌장염에 걸려 진통제로 펜타닐을 접하기도 하고, 다이어트 약을 통해 마약성분이 있는 약을 복용하기도 한다. 중독된 이들은 병원을 돌며 처방을 요구하고, 가짜 환자를 내세워 처방전을 받아가기도 한다. 아프다고 뒹굴며 막무가내로 투약을 요구하기도 한다. ‘뚫린 병원’을 찾아내면 그곳을 통해 약을 구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가운데 한국의 마약사와 단속 역사도 짚는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불법적 집권의 명분을 찾기 위해 ‘경제개발’과 ‘사회악 제거’를 내세웠다. 대대적 양귀비 단속에 나서며 마약을 ‘5대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1975년 정치·경제 위기를 ‘대마초 파동’으로 덮었다. 1970~1980년대 한국은 히로뽕으로 불리는 필로폰(메스암페타민)을 생산해 일본에 수출했다. 지금의 펜타닐이 중국에서 원료를 수입해 멕시코에서 가공한 후 미국에 팔리는 것처럼, 대만에서 원료를 가져와 한국(부산)에서 필로폰을 생산해 일본에 파는 ‘코리아 커넥션’이 생성됐다. 1982년 일본 필로폰 시장의 88.3%가 한국산이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한국도 마약 생산국에서 소비국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여전히 마약으로 돈을 번다.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제약공장에서 생산한 순도 높은 필로폰이 중국 등 해외로 판매되며, 한국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북한의 마약중독도 심각해 인구의 30~35%가 필로폰 중독자로 추정된다.

마약 남용으로 인한 중독과 죽음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두 책 다 강한 처벌만으로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처벌과 불법화보다는 관리와 치료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을 줄이고, 마약중독자들을 치료해 사회로 복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마약 단속은 ‘두더지 잡기 게임’ ‘끝나지 않는 추격전’으로 불린다. 하나를 막으면 이와 유사한 다른 마약이 튀어나온다. 새로 나온 마약은 더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쫓고 쫓기는 끝나지 않는 레이스가 한국에서도 음성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 작년 마약류 처방 환자 역대 최다…식약처, 에타젠 등 4종 물질 ‘마약’으로 지정
     https://www.khan.co.kr/national/health-welfare/article/202307191029001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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