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 죽음 이르게 한 성폭행범…인사도 나눈 ‘그 남자’였다

이문영 2023. 9. 9.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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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토요판] 커버스토리
말해지지 않는 죽음에 대한 부고② 봉인 직전 꺼낸 이야기
한겨레가 5월 보도한 ‘서울역 여성 홈리스 사망 사건’ 그 후
피해자 쪽 변론종결일에야 재판 첫 참여, 노골적 성폭행 확인
‘동의 없는 형사공탁’도 진행…“인권·지원체계 사각 보완 시급”
강자혜(가명)씨가 지난 4월17일 서울시립승화원 유택동산(공동산골장)에서 김목화씨의 유골을 뿌리고 있다. 홈리스행동 제공

이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한 죽음을 ‘법의 봉인’ 직전 꺼내 오기까지 지난했던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깜깜이로 묻힐 뻔한 사건

“황병관(가명·66) 피고인 맞으세요?”

재판을 시작하며 판사(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9부 김승정 부장판사)가 신분을 확인했다.

“네.”

7월7일 오전 피고인이 법정으로 들어오는 순간 강자혜(가명·67)의 눈이 커졌다.

“저 남자 맞아요.”

그가 방청석 옆자리에 있던 홈리스행동 활동가들에게 알렸다. 활동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법정에선 말하면 안 된다’는 손짓을 보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뼈밖에 안 남은 여자를 네시간 동안이나 때려서 죽였을까.

강자혜는 한눈에 남자를 알아봤다. 김목화(가명·55)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강자혜가 동료들과 가해자를 추리하며 떠올린 사람이 ‘저 남자’였다. 이날 재판에 오지 않았다면 남자가 정말 범인이었단 사실은 끝내 모를 수도 있었다. 사건 발생 뒤 이미 4개월이 지나 있었다.

피고인이 고개를 돌려 방청석을 둘러봤다. 앞선 재판에서 시선을 떨구고 있던 피고인들과는 태도가 달랐다. 그 모습이 강자혜의 머리에 강하게 남았다.

지난 3월16일 서울역 인근에서 생활하던 여성 홈리스가 사망했다. 열흘 전쯤 역 광장에서 사라진 그가 병원 응급실에서 숨을 거둔 사실이 이튿날부터 홈리스들 사이로 빠르게 전파됐다. 병원 의사가 변사 사건으로 경찰에 신고했고 수사에 나선 경찰이 서울역 주변을 탐문하면서 알려졌다. “김목화가 어떤 남자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에 ‘서울역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가해자가 홈리스가 아니란 것 외에 어떤 정보도 접할 수 없었다. 범죄 피해가 부른 죽음이었지만 경찰과 병원은 “개인 간의 문제”이고 “사적 영역”이라며 사실 확인 요청을 거부했다. 사실이 주어지지 않아 소문과 억측만 무성했다. 체포된 범인의 정체도, 범행의 이유도, 죽음의 과정도 모르는 채 동료들은 장례를 치렀다.

생전 고인과 인연을 맺었던 동료 홈리스,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가해자의 행적을 쫓았다. 애도하려면 사망의 경위라도 알아야 했다. 목격담과 증언들이 한 남자를 유력하게 지목했다. 공통의 인상착의를 모아 몽타주를 그렸다. ‘용의자’도 언제부턴가 서울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목화의 사망 즈음부터라고 사람들은 기억했다. 한겨레도 추적에 함께했다. 고인의 ‘마지막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광장의 여성들을 노리는 위험’을 전했다. 뉴스 한줄 되지 못했던 죽음은 그렇게나마 사망 두달 뒤 기록(5월13일 토요판 커버스토리 ‘말해지지 않는 죽음에 대한 뒤늦은 부고’)으로 남았다. 범인은 끝내 특정하지 못했다. 동료 홈리스들에게 김목화 사망 사건은 여전히 문 잠긴 방 깊숙이 감춰진 비밀이나 마찬가지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문을 두드려준 것은 취재 과정에서 연락이 닿은 고인의 형제자매들이었다.

삶의 난관들이 층층이 쌓인 몸은 죽어서도 난관에 가로막혔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삶을 살아왔고, 오래전에 가족과의 관계가 끊긴데다, 당사자는 뼛가루로 뿌려지고 없는데, 직계가족이 권리·의무를 포기한 범죄 피해자일 때, 겹겹의 빗장을 풀지 못하면 죽음의 경위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연락 두절 20여년 만에 접한 근황이 ‘폭행 사망’ 소식이었다. 형제자매들은 “직계가 아니어서인지” 수사기관으로부터 사건 처리 결과와 송치 전후 상황을 충분히 전달받지 못했다. 경찰에 문의했을 땐 ‘검찰 콜센터를 통해 확인하라’는 말을 들었다. 콜센터가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고 신고 절차를 밟는 동안 평생 형사사법 체계와 거리를 두고 살았던 그들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로 들어선 것처럼 막막”했다.

고인의 동생이 파악(5월 중순)해서 알려온 ‘사건번호’로 가해자 재판 정보를 확인했다. 재판(4월11일 법원 접수)은 이미 개시(5월3일)돼 있었고 두차례 심리까지 마친 뒤였다. 그사이 가해자는 세차례 반성문을 제출해놓고 있었다. 고인이 사실상 무연고 사망자로 간주되면서 수사 단계에서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본인 사망 땐 유족)의 의견은 반영될 틈이 없었다. ‘사건 인지→가해자 추리→한겨레 보도→사건번호 확인’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면 유족은 재판 사실도 모르는 상태로 가해자의 반성문(선고까지 총 여섯차례)만 법정에 쌓인 채 사건이 종결될 뻔했다. 피고인 황병관의 이름과 혐의도 이때 겨우 알게 됐다.

“아는 남자가…”

‘유사강간치사’였다.

단순 폭행이 아니었다. 가해자의 정체를 쫓으면서도 아니길 바랐던 사실이 여섯 글자의 죄명으로 요약돼 고인의 동료들과 활동가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홈리스행동은 단체 운영위원인 장서연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게 법률 지원을 요청했다. ‘홈리스인권지킴이’(매주 금요일 저녁 서울역과 남대문 등지에서 거리 홈리스들을 상담하고 인권침해를 감시)로도 활동했던 그는 역 광장에서 생전의 김목화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굉장히 왜소하고 말랐던 목화님”이 성폭력 범죄로 사망했다는 소식에 놀란 그는 공익 변론의 뜻을 유족에게 전했다.

고인의 형제자매들은 의견이 나뉘었다.

가족과 연락을 끊고 길의 삶을 선택한 고인뿐 아니라 고인과 연락이 끊긴 그들에게도 지난 시간은 큰 상처였다. 경찰서에서 엄마의 사망을 확인한 뒤로 전화를 받지 않는 딸의 깊은 원망도 이해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동생의 피투성이 시신을 보고 온 언니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느닷없이 들이닥친 고통’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고인의 억울함과 고됐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었던 막냇동생이 다른 가족들을 설득해 재판 참여를 결정했다. ‘공감’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해온 백소윤 변호사가 공동변호인으로 합류해 6월30일 법원에 선임계를 제출했다. 3차 공판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피해자 변호사 나오셨습니까?”

7월7일 판사가 물었다.

“출석했습니다.”

유족들은 방청석에 앉았다. 고인의 홈리스 동료들도 함께했다. 재판 일정 막바지가 돼서야 참석한 이유를 확인하려는 듯 판사가 질문했다.

“가족이 온 것 같은데 그간 아예 (피해자의) 생사를 모르는 상태였던 건가요? 아는데 연락만 주고받지 않았던 건가요?”

장서연 변호사가 답했다.

“피해자분이 연락을 끊어서 몰랐습니다.”

지난 7월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서울역 여성 홈리스 사망 사건’ 가해자(유사강간치사)에 대한 결심공판이 열렸다. 피해자의 동료 홈리스 강자혜(가명)씨가 법정에서 방청한 재판 장면과 가해자의 범행 사실, 자신의 목격 내용 등을 담아 그림으로 그렸다. 강자혜 제공

피고인 옆엔 국선변호사가 자리했다. 형사사건 피고인이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을 때 재판부는 국선변호사를 ‘반드시 지정해야’ 했지만 피해자의 국선변호사는 검찰이 ‘지정할 수’ 있었다. “피고인에게 변호사가 없으면 재판이 열리지 않지만 피해자 쪽 변호인의 선임 여부는 재판의 필수 조건이 아니”(백소윤)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 국선전담변호인’ 등의 공적 지원 체계가 마련돼 있다는 사실이 김목화의 형제자매에겐 설명되지 않았다. 피해자가 사망했고 자녀가 관여하길 원치 않을 때 재판은 소리 소문 없이 시작되고 끝났다. 직계 아닌 가족들에겐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가해자가 누구인지, 범행 이유는 무엇인지, 선고 결과가 어땠는지도 ‘미지의 영역’이 되고 말았다.

“영상 증거조사는 비공개로 진행하겠습니다.”

재판장의 결정에 따라 방청객들이 모두 법정 밖으로 나갔다.

황병관이 김목화를 폭행하는 시시티브이(CCTV) 영상이 재판정 스크린에 재생되는 동안 ‘목격자들’은 복도 구석에 모였다. 몽타주까지 그려본 ‘용의자’가 피고인과 동일인인지 직접 확인하러 온 홈리스 동료들은 각자 의심했던 사람과 일치하는지 맞춰봤다.

“그 골목 남자네요.”

폭행 당일(3월5일) 밤 신호성(가명·41)은 사건 현장 골목에서 “몸이 축축 늘어지는 목화 누나를 뒤에서 껴안고 일으켜 세우던 그 남자”를 봤다. 사망 이튿날(3월17일) 서울역파출소 노숙인전담경찰이 범인 탐문 중 내민 사진을 본 윤연정(가명·47)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자혜는 “서울역 3층에서 웃으며 인사했던 그 남자를 법정에서 보게 되자 심장이 쿵쾅댔”다. “아는 사람이 김목화를 성폭행하고 죽기까지 방치했다는 사실에 무섭고 떨렸”다. 그들 사이엔 공통의 목격담이 있었다.

“남자가 서울역에 나타나면 김목화부터 찾았다. 김목화가 보이지 않을 땐 어디 있는지 묻고 다녔다. 김목화가 자리를 비운 텐트(거리 홈리스 생활공간) 앞에서 서성대곤 했다. 누구냐고 물으면 ‘택시 운전사’ 또는 ‘트럭 운전사’라고 답했다. 왜 찾냐고 물으면 ‘목화 지켜주려 한다’고 했다. 김목화 외에 다른 여성 홈리스들에게도 접근하거나 주위를 맴돌았다.”

유족들이 그들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만약 법정에 가지 못했다면

“피고인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상 조사가 끝난 뒤 재입장한 법정에서 검사가 “최종 의견”을 밝혔다.

“피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를 이용해 피해자의 주거지로 따라가서 성관계를 하려다가 피해자가 길에 누워버리고 뜻대로 되지 않자 피해자를 폭행하면서 유사강간 해 결국 복강내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피고인의 변호사는 최후변론에서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중대한 잘못을 한 사실은 맞지만 술을 깨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관대한 처벌”을 호소했다.

황병관은 지난 4월 구치소 입감 때 제출한 자필 의견서(법원 제출용)에서 고인과 “이따금 만나 식사 정도 했”던 관계라고 적었다. “술을 먹고 이런 사고를 일으켰다”며 “심적으로 매우 불안하다”고 했다. 범행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른다”고 썼다.

검찰 공소장과 증거목록에 정리된 그의 시간대별 행적은 “목화 지켜주는 사람”이 “우발적으로” 할 수 없는 노골적 범죄 행위였다. 지난 3월5일 서울역 광장을 배회하던 황병관은 저녁 6시52분께 김목화를 만났다. 술과 밥을 사준 뒤 ‘고시원에 간다’는 김목화를 따라갔다. 서울 중구 중림동의 한 빌딩 골목에서 김목화가 술기운으로 쓰러지자 8시25분부터 이튿날 0시11분까지 손, 발, 주먹 등으로 300여회 폭행했다. 얼굴, 옆구리, 성기 등을 때리거나 걷어찼다. 발로 배를 밟고 위에 올라가 앉아 있기도 했다. 문자로는 옮길 수 없는 유사강간행위를 13회 반복했다. 움직이지 않는 김목화를 방치하고 현장을 이탈했다. 그에겐 오래전 살인죄로 처벌받은 전력도 있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는 판사의 말에 황병관이 머리를 꾸벅이며 짧게 말했다.

‘2022 홈리스 추모주간’ 첫날인 지난해 12월12일 홈리스·무연고 사망자들을 기리는 이름·생애 정보와 추모 장미꽃이 서울역 광장 계단에 놓여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재판장은 이날 공판(세번째 기일)에서 변론을 종결했다. 피해자 쪽이 참여한 첫 재판이 결심공판이 됐다. 증거가 명확하고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해서였지만 피해자 쪽이 법정에 오기까지에 비해 ‘법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매끈했다. 그렇게라도 이날 법정에 있지 않았다면 피해자 쪽은 ‘그 일’도 모르는 채 재판이 끝났을 수도 있었다.

피해자 유족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 있었다.

“(합의가 안 돼) 형사공탁만 하셨고요?”

판사의 질문에 피고인 변호사가 답했다.

“네.”

장서연 변호사가 밝혔다.

“피고인 쪽으로부터 합의 의사가 있다는 연락을 전혀 받은 바 없습니다.”

황병관의 변호사가 말했다.

“성폭력 사건상 피해자를 확인하기 곤란하고 (이 사건 피해자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형사공탁으로 진행했습니다.”

백소윤 변호사가 말했다.

“유가족들은 이 사건 (범행) 사실들을 오늘에야 확인했습니다. 형사공탁 내용도 전달 자체가 된 바 없습니다.”

피고인은 7월5일 1천만원을 형사공탁했다. 법원이 피해자 변호사들에게 공탁 사실을 전화로 고지한 시점은 이날 재판 나흘 뒤인 7월11일이었다.

지난해 12월9일부터 피해자 동의 없는 형사공탁이 가능(공탁법 제5조의2 ‘형사공탁의 특례’)해졌다. 가해자 쪽에서 피해자의 개인정보(특례 시행 이전까지 피해자 동의를 입증하는 공탁의 필수 조건)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를 막겠다는 취지였으나 결과적으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하는 일방적인 공탁까지도 피해 회복이라고 간주하게 하는”(한국성폭력상담소) 길을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범죄 양형기준’의 감경 사유에 ‘피해자 동의 없는 공탁 제외’ 문구의 추가를 요구하는 이유였다. 우려는 김목화 사망 사건에서도 확인됐다. “변론 종결 당일 법정에 가지 못했다면 유족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형사공탁이 가해자 감경 수단으로만 활용되고 말았을 것”(백소윤)이다.

김목화의 유족은 공탁금 수령을 거부했다. 대신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저희 언니에게, 판사님, 연민을 가져주세요. (…) 언니가 홈리스로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가해자) 형량의 저울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탄원서를 쓴 막냇동생은 따져 물었다.

“언니가 병원으로 옮겨진 뒤로도 저희 가족한테는 연락이 오질 않았습니다. 10일간이나 병원에 있었다고 하는데 사망한 후에야 경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까요. 홈리스 환자는 그렇게 외면해도 되는 사람입니까.”

실려 왔을 때부터 심각한 폭행 정황을 모르지 않았을 병원은 왜 사망한 뒤에야 경찰에 신고했나. 병원 이송 과정에서 고인의 상태를 확인했을 경찰은 왜 사망하고 나서야 수사를 시작했나. 수사기관도 의료기관도 홈리스라고 쉽게 방치해버린 것은 아닌가. 유족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해소되지 않는 이 의구심들이야말로 고인이 맞닥뜨린 진짜 난관인지도 몰랐다.

지난 3월6일 범죄 피해로 사망한 김목화(가명)씨의 장례가 4월17일 서울시립승화원(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무연고 사망자 빈소에서 치러졌다. 고인의 여성 홈리스 동료들과 공영장례 관계자들이 고인의 영정에 절하고 있다. 홈리스행동 제공

보이지 않는 여자들

“거리에 산다고 맞아 죽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자혜도 탄원서를 써서 보탰다. 그는 사망 전 김목화와 몇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지만 이름은 몰랐다. 황병관이 “목화 봤냐”고 물어서 알게 됐다. “그 남자가 최후진술 때조차 사과의 말을 하지 않아” 강자혜는 속이 끓었다.

그날 법원을 다녀온 뒤 광장 동료들한테서 황병관에 대한 다른 말을 들었다. “젊은 여자 홈리스의 알몸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더라”는 이야기였다. 강자혜도 아는 여자였고 황병관이 그 여자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본 기억도 있었다. “여자 홈리스들은 자기 얼굴이 찍히는 걸 극도로 꺼렸고 그 여자도 그랬”다. “술을 먹였거나 술에 뭘 타서 먹인 게 틀림없다”고 강자혜는 추측했다.

그가 자신의 잠자리를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여성 홈리스들을 노리는 일상의 위험에 오래 시달려온 탓이었다. 서울역에 올 때마다 김목화의 위치를 묻고 다닌 황병관처럼 강자혜에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여자”라며 자신의 행방을 묻고 다니는 남자가 있었다. 그때마다 강자혜는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길을 오가면서도 긴장했고 남자가 보이면 숨거나 도망쳤다. “여자 홈리스라면 누구나 겪는 일들”이었다.

여성들이 홈리스가 되는 과정 자체가 폭력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에서 도망치느라 그들은 ‘집 없는 여자들’이 됐다. 사방의 눈길에 노출당한 광장에서도, 하룻밤 몸 누일 곳을 찾아간 교회에서도, 한끼 밥을 얻기 위해 줄을 선 무료 급식소나, 임시주거 지원을 받아 생활하는 고시원에서도, 그들은 여자여서 욕을 먹었고 “남자들이 꼬여 시끄러워진다”며 거부당했다.

스스로를 지키려면 보이지 않아야 했다. 찜질방이나 피시방 등으로 몸을 감추며 정부의 ‘노숙인’ 집계에서도 제외됐다. 광장을 피해 공원 화장실을 청소해주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통과해온 시간은 최근 출간된 책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후마니타스)에도 담겼다. 강자혜(책에서 사용한 이름은 ‘서가숙’)와 윤연정(책에선 ‘임미희’)이 ‘보이지 않는 여자’로 살아온 시간들도 글로 묶였다.

홈리스행동은 재판부에 낸 의견서에서 김목화의 죽음이 “성별 특성에 의해 더욱 취약한 여성 홈리스를 표적으로 한 사건”임을 강조했다. “가해자를 엄벌해 인권과 (남성 중심) 지원 체계의 사각에 놓인 여성 거리 홈리스의 안전과 복지가 강화될 수 있도록 사회와 정부·지방자치단체에 경종을 울려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건 범행으로 피해자는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됐는데 이는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참담한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전국에 2차 장마가 시작된 8월22일 오후 선고공판이 열렸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17년에 처한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는 내내 피고인도 재판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피고인의 형사공탁 사실이 양형 요소로 반영됐다. ‘말하지 않으려는 세계’에서 투명하게 증발할 뻔했던 김목화의 죽음이 가해자의 범죄 사실 속에서 짧게 언급됐다.

8월24일 황병관은 항소했다. 구치소 수감 때 작성한 의견서에선 “법률에 따라 처벌하시면 그대로 따르겠다”고 했었다. 검찰도 다음날 항소장을 제출했다.

“사건 선고가 사건 종결을 의미하진 않으니까요.”(홍수경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

홈리스행동은 “여성 홈리스 지원 체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유사 범죄의 재발”을 염려했다. “고인의 죽음이 동료 홈리스들의 불안만 키우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도록” 대응 활동을 계획했다. 다섯달이 지나서야 파악할 수 있었던 고인의 사망 경위와 재판의 의미를 짚는 성명·정책제안서를 오는 12일 발표한다. ‘홈리스 뉴스’ 특별판을 제작·배포(15일)해 여전히 ‘소문들’로 혼란스러운 홈리스 사회에 정확한 사실도 알릴 예정이다. 21일 저녁엔 그동안 유예할 수밖에 없었던 고인의 서울역 추모제를 ‘마침내’ 연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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