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이 박살 났다 [반려인의 오후]

정우열 2023. 9. 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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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당근마켓) 거래 좋아하시는지? 왠지 부끄럽지만 나는 좀 좋아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방금 전까지 하얗고 영롱하던 에어컨이 박살 나며 도로에 나뒹구는 걸 사이드미러로 목격한 이후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에 못지않은 고통으로는 에어컨 부재로 낮이고 밤이고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워서 땀이 줄줄줄, 일을 할 수도 없고 빈둥거리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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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이 되는 동무’. 반려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입니다. 고양이, 개, 식물 등 짝을 이뤄 함께 살아가는 반려인들의 단상을 담았습니다.
당근마켓 거래로 에어컨을 사서 싣고 오다가 대로에서 떨어뜨려 박살이 났다. ⓒ정우열 제공

당근(당근마켓) 거래 좋아하시는지? 왠지 부끄럽지만 나는 좀 좋아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매너온도’는 43.4℃로 주변 친구들 사이에선 꽤 높은 편에 속한다. ‘매너온도는 당근마켓 사용자로부터 받은 칭찬, 후기, 비매너 평가, 운영자 제재 등을 종합해서 만든 매너 지표예요.’ 당근 측의 설명이다. 1년 전쯤 픽업트럭을 샀는데(이건 당근 아니고 자동차 영업소에서 샀다) 당시 친구들과 농담처럼 한 얘기가, 이제 당근에서 냉장고도 살 수 있다는 거였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며칠 전 당근에서 에어컨을 사서 짐칸에 싣고 오다가 차가 씽씽 달리는 대로에 떨어뜨려 시원하게 박살이 났다. 쓰던 에어컨이 고장 났는데 부품이 없어 수리할 수 없다는 비보를 들은 다음 날이었다. 당근으로 샀지만 비닐도 벗겨내지 않은 거의 새 에어컨이었다. 거실처럼 좀 넓은 공간을 냉방 하는 용도의 스탠드형과 방에서 쓰는 벽걸이형이 세트로 묶인 상품이었는데, 박살 난 것은 스탠드형이었다. 긴 외형의 에어컨이 상반신은 무겁고 하반신은 거의 빈껍데기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 화근이었다. 에어컨 실외기를 혼자 들 수 없을 것 같아서 친구 S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형, 무거운 거 나를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S군으로 말하자면 과거 오스트레일리아 워킹 홀리데이 시절 이삿짐센터에서 8개월간 근무한 경력자로 이따금 이런 믿음직한 말을 했다. 내가 판매자와 만나 송금하고 인사하는 사이, S군이 차 짐칸에 에어컨을 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에어컨을 묶은 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나는 스탠드형 부분이 불안정하게 묶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S군은 그 분야에서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전문가니까 알아서 잘했겠지, 그런 생각이 빠르게 스쳐갔던 것 같다.

방금 전까지 하얗고 영롱하던 에어컨이 박살 나며 도로에 나뒹구는 걸 사이드미러로 목격한 이후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우선 사소한 부주의로 적지 않은 돈을 길바닥에 흩뿌렸다는 사실이 괴롭다. 그에 못지않은 고통으로는 에어컨 부재로 낮이고 밤이고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워서 땀이 줄줄줄, 일을 할 수도 없고 빈둥거리는 것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겠다. 또 비록 스탠드형은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벽걸이형 에어컨과 실외기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는 점도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이미 단종된 제품이라 스탠드형만 따로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쩡한 벽걸이와 실외기를 순장시키는 것 역시 선뜻 용기 내기 어려운 일이다. 형, 제 실수니까 제가 변상할게요. 아무런 이득도 없이 순전히 날 도우려다 생긴 일로 S군이 자꾸만 자책하고 미안해하는 것도 몹시 마음이 쓰인다.

근데 이게 다 반려인이랑 무슨 상관이냐, 반려 가전제품 얘기냐 하면 그건 아니고, 벌써 1년 넘게 임시 보호 중인 하숙견 ‘달리’ 이야기다. 달리는 꽤 오랫동안 집 안에 들어오는 걸 무서워해서 마당에서 지내왔는데, 최근 맹훈련으로 간신히 집 안에서도 편히 지내게 된 참이었다. 그런데 에어컨의 부재로 집 안이 더워졌고, 차라리 마당이 더 시원해서 다시 에어컨을 장만할 때까지 며칠간 달리를 마당에서 재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제저녁 평상 아래 누워 있는 달리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삐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위치가 집 안에서 다시 마당으로 강등되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땀 흘리며 글 쓰는 내 발 아래서 영문도 모른 채 헥헥대며 누워 있다.

정우열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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