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자유시 참변'은 일본의 사주로 일어났다?
한인 사회주의 양대 세력 갈등…통합부대 주도권 다툼 유혈 사태로
"홍범도 장군은 중립 지켰으나 높은 명성 때문에 파쟁에 이용"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때아닌 이념 논쟁을 불러왔다.
논란은 지난달 말 육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사관생도를 양성하는 곳에 소련공산당 가입 전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두는 게 적절치 않다는 문제 제기에 따라 독립기념관으로 흉상 이전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야당과 보훈단체들은 6·25전쟁과 냉전체제 이전에 살았던 항일 독립 영웅까지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며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여권 일각에서도 이념 논쟁으로 번지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국방부는 입장문을 통해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행적에 대해선 다른 평가가 있다며 흉상 이전 방침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언론에선 자유시 참변을 일본과 결탁한 러시아공산당이 한인 무장단체를 제거해 달라는 일본 측 요구로 일으킨 독립군 학살 사건인데 홍범도 장군이 여기에 연루됐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 같은 보도 내용은 근거가 있을까? 이를 판단하려면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배경과 사건의 전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1921년은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막 건립돼 독립운동 열기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시기이자, 러시아 볼셰비키혁명(1917년)과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의 종식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던 세계사적 격변기였다.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 등을 보면, 당시 국내외에선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후 처리 원칙으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외교적 교섭과 세계 여론 조성으로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파리강화회의에선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에 대해선 민족자결권이 적용되지 않았고, 뒤이은 국제연맹회의와 워싱턴 태평양회의에서도 미국 등 열강들은 한국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19년 후반부터는 서구 열강에 기댄 '외교론' 대신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이 부상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 중심의 독립 청원 외교가 힘을 잃고, 1919년 11월 사회주의 계열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독립전쟁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임시정부 국무원은 무장독립전쟁 노선을 시정방침으로 정한 뒤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삼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흩어져 싸우던 100개 가까운 항일무장부대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식민지 종속국들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를 약속한 신생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따르면,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20년 4월 레닌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에 특사(한형권)를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자금 지원 등 4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한 뒤 양 정부 간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당시 일본 언론 보도와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6개 조항으로 된 공수동맹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군단을 설치해 시베리아 지방에 주둔시키고 러시아 총사령관의 지휘받도록 하며,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과 싸울 때 러시아를 원조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볼셰비키 혁명 후 열강들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 세력(백군)과 내전 중이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적군)는 항일 투쟁을 벌이던 상해임시정부와 한국 사회주의자들을 적극 지원하며 협력했다. 영토 야심이 컸던 일본이 열강 중 가장 많은 7만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으로 출병하며 백군을 지원하자, 한인 부대들은 적군 편에서 맞서 싸웠다.
소비에트러시아는 열강의 간섭을 약화하기 위해 1920년 4월 아무르주, 자바이칼주, 사할린주, 연해주 등 극동지역에 완충국으로 불리는 '극동공화국'을 수립하고 일본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도 진행했다.
[표] 대일한로공수동맹
[자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발췌]
3·1운동을 전후해 한국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선 러시아, 중국, 일본을 거쳐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확산했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임경석)에 따르면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모태가 됐다. 학계에선 이동휘를 비롯한 신민회 좌파들이 일제 탄압으로 망명한 뒤 1918년 4월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 사회에서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로 본다.
이와 별개로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1920년 7월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를 결성해 한인사회당 그룹과 경쟁했다. 한인사회당은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근거지를 중국 상하이로 옮겨와 '상해파 공산당'으로 불리게 됐으며, 전로한인공산당은 러시아령 한인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와 연합하면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으로 불렸다.
두 그룹은 혁명론과 정치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상해파는 당면 과제를 민족해방혁명으로 보고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한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을 내세우며 대립했다.
1921년 6월 극동공화국 영내인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인 자유시 참변은 이 같은 배경 위에서 일어났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군 부대들은 부대 통합을 위해 1920년 10월부터 자유시로 집결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등을 보면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소비에트러시아가 합의한 공수동맹이 부대 통합의 토대가 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집결한 부대는 2천~3천명 규모로 추산되는데 크게 세 부류였다. 하나는 자유시에 주둔해 있던 한인자유보병대대(자유대대)였고, 나머지는 백군, 일본군과 싸웠던 연해주 부대들과 북간도 지역에서 온 독립군 부대들이었다.
홍범도 장군 부대를 비롯한 간도 독립군들은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밀려 퇴각해온 상황이었다.
이들은 부대 통합의 대의에 공감했으나 성격은 이질적이었다.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의 정치적 지도를 받은 반면 연해주와 간도 부대들은 한인사회당(상해파)과 연계돼 있었다. 처음에는 연해주 부대를 중심으로 부대가 통합돼 극동공화국 국방부 산하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편제됐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간도 부대들도 여기에 포함됐다. 그러나 자유대대가 반기를 들면서 갈등을 빚었다.
[표]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의 차이
[자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발췌 부분 수정]
그러다 1921년 1월 이르쿠츠크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극동비서부가 설립되면서 주도권은 자유대대로 넘어갔다. 극동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의 의견대로 통합 부대를 자유대대 중심의 '고려혁명군'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한의용군 측의 반발에 부딪혔다. 대한의용군 측은 부대 통합의 조건으로 백군 가담 전력이 있는 고려혁명군 간부들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며 대치했으나 설득과 중재 끝에 타협이 이뤄졌다. 그러나 통합 부대의 편제 문제를 놓고 다시 불거진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고려혁명군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결정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2009년 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윤상원) 등에는 자유시 참변의 전말이 당시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상세히 기술돼 있다. 참사 당일(6월28일) 무장해제를 위한 고려혁명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가급적 교전을 피하려는 양측의 노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고려혁명군의 전면적인 공격은 30분 정도에 그쳤고 대한의용군은 내내 거의 응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혁명군은 전체 사망자 36명, 포로 864명으로 밝힌 반면 대한의용군은 행방불명을 포함한 사망자가 400~600명이라고 주장했다.
홍범도 장군은 무력 충돌이 있기 한 달 전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통합부대 재편 결정이 내려지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다른 간도 부대들과 함께 대한의용군 주둔지에서 고려혁명군 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서전 격인 '홍범도 일지'를 소개한 책 '홍범도 장군'(반병률)에는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장군이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이 있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뒤 대한의용군 포로들에 대한 재판에 3명의 재판위원 중 1명으로 참여했다.
이와 관련해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책에서 "홍범도는 사건(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참변 이후 군사지휘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파쟁에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윤상원 교수도 홍범도 장군의 재판 참여가 명망과 권위 때문이었다고 봤다.
자유시 참변은 해외 한인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이후 항일무장투쟁에 큰 짐을 지웠다. 자유시 참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독립군 부대 간의 주도권 다툼이었지만, 이면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이 있었다.
러시아공산당의 일관성 없는 정책과 내부 알력도 자유시 참변의 한 원인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상해파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의 지지를 받은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과 연결돼 있었다.
2020년 논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오세호)에선 "해당 연구들은 통합한인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정치적 갈등을 자유시 사변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며 "그러나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갈등만으로는 그 발생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 이를 둘러싼 소비에트러시아의 정책, 그리고 한인부대 통합 과정에서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유시사변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선행 연구들의 시각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비춰보면 일부 언론 보도처럼 자유시 참변을 일본과 결탁한 러시아공산당이 한인 독립군 부대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자유시 참변은 모스크바의 공산당 수뇌부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다뤘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1년 11월 이르쿠츠크파의 반발에도 '한국위원회'를 구성해 자유시 참변의 진상을 조사한 뒤 피해자들의 원상회복과 양 세력의 통합 추진 결정으로 상해파의 손을 들어줬다.
러시아공산당과 극동공화국은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백군 격퇴에 집중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으며, 이를 위해 극동공화국 영내 일본군에 적대적인 군대의 주둔을 금지하라는 일본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한인 독립군도 극동공화국 내에 공공연히 주둔할 수 없었지만 협력은 지속됐다. 간도 독립군이 자유시로 이동할 때 일시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과 자유시에 주둔한 한인 부대들을 러시아혁명군 산하 부대로 편성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자유시에서 결성된 1천700여명의 고려혁명군은 당초 바로 만주로 출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21년 8월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극동공화국과 일본의 협상인 '대련회담'이 열리면서 이르쿠츠크로 회군하게 됐다. 이는 정세 변화에 따른 대응으로 러시아공산당과 일본의 결탁이라고 하긴 어렵다.
대련회담이 결렬되기 전인 1921년 10월 일본군과 백군이 총공세로 극동 하바롭스크를 재점령하면서 러시아 내전의 최후 단계인 연해주해방전쟁이 시작됐으며, 한인 부대들은 적군 편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투와 대치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공산당이 일본의 요구로 한인 독립군들을 자유시에서 몰살했다고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일본군이 1922년 10월에서야 철병 조약을 맺고 연해주에서 물러나면서 5년에 걸친 러시아 내전은 끝이 났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보면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치른 시기는 3·1운동 이후 사회주의가 한국에서 새로운 사조로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진 청년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당국은 이런 사회주의를 식민 지배를 위협하는 불온사상으로 간주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손잡은 좌우합작 정부로 출범해 다양한 사상과 세력들이 경쟁하면서도 독립이란 대의를 두고 협력했다.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의병 활동을 하다 1908년 연해주로 넘어와 주요 활동무대로 삼은 홍범도 장군에게 사회주의는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이자 항일무장투쟁의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맞선 러시아령 한인들에게 러시아 내전 기간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 대신 적군 편에 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은퇴 후 연해주 이만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1927년 59세에 소련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이렇다 할 활동 없이 평범한 여생을 보내다 강제 이주된 카자흐스탄에서 1943년 75세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 때인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며, 1994년 김영삼 정부부터 추진해온 카자흐스탄에서의 유해 봉환이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결실을 거둬 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가입 전력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당시 시대 상황을 무시한 채 지금의 정치적 잣대로 평가하는 게 타당한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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