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도 또 나오는 무간지옥…벽지와 함께한 7일 [ESC]
공방 꾸미기 ‘고난의 행군’
뜯지 않고 서너겹 덧발라진 상태
방수·방습 효과 탓 제거 애먹어
고민 끝 ‘천장 셀프 철거’도 3일
움직이기 전에, 말하기 전에, 결정하기 전에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진리를 자주 잊어버리며 산다. 그리고 후회한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목공방 자리로 쓸 구옥을 손대는 과정에서 내가 저지른 짓이 딱 그랬다.
그냥 돈 좀 더 주고…
17.5평짜리 공간에 방이 3개, 부엌과 거실이 있는 구조다. 최대한 넓은 작업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선 벽체의 일부 혹은 전체를 허물어야 했다. ‘셀프’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없는 영역이 있다. 게다가 오래된 집이 아닌가. 함부로 허물었다가 구조상 무리가 생길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지붕이 내려앉을 위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폐자재를 처리하는 것도 문제다. 아무리 비용절감이 중요해도, 벽체 철거와 폐기물 처리는 전문업체에 의뢰하기로 마음먹은 터다.
다행히 내력벽이 아니었다. 모두 뜯어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벽체 철거는 일단 방침이 정해진 후에는 발주자가 관여할 일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 무시무시한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한 현장 옆에 조용히 시원한 음료수나 갖다두고 지켜보면 그만이다. 1t 트럭에 실린, 실내의 각종 ‘파괴장비’에 연결된 거대한 유압장치는 연신 굉음을 질러댔다. 기계는 빠른 속도로 벽체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벽체 철거를 직접 하는 사람도 있단다. 속칭 ‘함마’라고 부르는 망치로 직접 두들겨 조금씩 깨는 것이다. 나는 못할 것 같다. 존경한다.
남은 문제는 천장. 천장을 철거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두고 새로 합판이나 석고보드를 붙여 재활용할 것인가. 이건 천장 단열시공을 새로 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결국 비용이라는 뜻이다. “천장 구조물은 철거하지 않을게요. 그대로 남겨주세요!” 아, 이 말을 나는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셀프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현장이 오래된 집일수록 발주자는 애초에 정확한 계획을 가지고 분명한 원칙을 세워둬야 한다.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기본이다. 그 기본을 지키지 못했다. 철거업체가 철수한 뒤 며칠을 고민했다. 천장 철거를 할까, 말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결국 뜯어내기로 했다. 벽체 철거와 함께 진행했다면 약간의 비용 추가로 해결될 일이었다. 전문가들이므로 큰일도 아니고, 폐기물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터다. 시공했던 업체에 연락해 다시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혼자 하기로 했다. 이것도 경험이다.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다. 창업일을 정해두고 시일을 맞춰야 하는 공사가 아니므로 시간은 어차피 많다. 마구잡이로 뜯어내지 않고 최대한 길이를 살려 철거하면 천장 구조물의 목재도 어디인가에 재활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은 결국 옳았음이 나중에 증명된다.)
‘직쏘’(톱날이 수직으로 움직이며 목재를 절단하는 전동 수공구) 한 자루를 들고 사다리에 올랐다. 앞으로 이 사다리와 우마(접이식 발판의 제주 방언)에 몇 번 정도 오르면 공사가 끝날까? 1000번? 벌써 200번은 탄 것 같은데, 아직 멀었다. 육아와 살림이 본업인 상황에서 허용된 작업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천장 셀프 철거에 3일이 걸렸다. 사다리를 오르내릴 때마다 현장 곳곳에는 스티로폼과 목재가 그득히 쌓여갔다. 쓸 만한 목재를 남겨두고, 남은 폐기물은 근처 공업단지의 처리업체에 직접 가져가 무게를 달아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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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호와 함께 날아가다
지난한 철거 과정의 백미는 다름 아닌 벽지였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다. 시련의 종류, 고통의 강도, 극복의 서사가 제각각 다를 뿐이다. 내게 2022년은 창업의 해이자, 벽지와의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해로 기록될 것이다. 각종 잡동사니를 들어낼 때부터 시험 삼아 뜯어내 봤던, 오랜 세월이 겹겹이 내려앉은 벽지 조각을 손에 들고 앞으로의 노동강도와 시간을 어림해봤다.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라인더(공사 현장에서 널리 사용되는 전동 절삭기의 한 종류)로 갈아내는 방법도 있다는데 결과물에 자신이 없었다. 하긴, 그라인더도 없다. 벽은 페인트 작업으로 마감할 요량이었기 때문에 어쨌든 깨끗한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벗겨내기로 했다.
누군가 그랬다. 벽지는 뜯는 게 아니라 그냥 덧바르는 거라고. 옛날엔 그랬다는 거다. 과연. 구석구석 눈에 들어오는 모든 벽마다 콘크리트 벽에 3겹, 혹은 4겹의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물을 뿌려 불리고 스크래퍼로 조금씩 긁어 벗겨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벽지라는 게 가히 대단한 방수·방습 효과를 지닌 물건이라는 걸 알게 됐다. 물이 잘 스며들지 않는 벽지에 물을 먹인다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힘들게 물을 먹여 한 겹의 벽지를 벗겨내도 그 아래의 벽지는 뽀송뽀송했다. 시멘트를 묽게 탄 물을 벽지에 바르고 적당히 말린 뒤 벗겨내면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 후퇴도, 우회도 없다.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 물론 그 전진의 속도는 가히 한심했다. 뿌리고, 긁는다. 뿌리고, 긁는다. 그야말로 벽지의 무간도, 무간벽지다.
어쩌다 벽지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겨 꽤 많은 양의 물을 흘려 넣을 수 있을 때, 그래서 한 겹 이상의 벽지가 한 번에 쫙 뜯겨나갈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면 또 겹겹이 벽지였다. 시시포스가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린 아크로코린토스산처럼, 내가 넘어야 할 거대한 도전이다. 6월이었다. 이미 시작된 서귀포의 폭염과 습기 속에서, 긁고 또 긁었다. 벗기고 또 벗겼다. 벽지를 제거하는 데에만 일주일이 꼬박 걸렸다. 그래도 시작한 일을 대충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손톱만큼 남은 벽지 조각도, 일단 눈에 보이는 이상 깨끗하게 벗겨낼 수밖에.
2022년 6월21일. 누리호가 우주로 날아간 날. 제주도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효돈의 목공방 인테리어 현장에서는 드디어 마지막 한 점의 벽지마저 벗겨졌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알 수 없던 어수선한 벽체가 원래 갖고 있던 깔끔한 면을 드러냈다. 마지막 벽지 조각을 손에 들고 나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해냈다! 장하다! 맥주가 필요했다.
나무공방 쉐돈 대표
한겨레 기자로 일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생각해 2016년 온 가족이 제주도로 이주했다. 본업은 육아와 가사였는데, 취미로 시작한 목공에 빠져 서귀포에서 목공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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