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아내가 10살 연하 제 부하와 재혼한답니다”…유럽을 뒤흔든 결혼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9. 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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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38]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내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따뜻한 대화를 나눈 게 먼 옛날처럼 느껴집니다. 사랑을 나누는 건 꿈도 못 꾸고, 간단한 포옹마저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지요. 행동 하나하나가 사무적으로만 느껴지는 나날. 사랑은 이렇게 쉽게 증발하는 것이었던가요.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가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서야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잘못된 것인가 기억을 되돌려 봅니다. 전쟁 원정 때였습니다. “남편을 홀로 보낼 수 없다”면서 굳이 전장까지 따라왔던 그녀였지요.

영국 화가 엠마 샌디스의 중세의 아름다움. 1875년 작품.
하지만 정착지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변해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자신의 숙부와 만난 그녀. 두 사람은 뭔가 이상해 보였습니다.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눴고, 알 수 없는 농밀함도 느껴졌습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 싶어 아내를 질책했지요. 가장으로서, 왕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헤어져요.”

하지만 결국 일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이별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그녀의 재혼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이벌이자 부하이기도 했던, 이웃 나라의 왕이 상대였습니다. 길고 긴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 그의 아내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결혼은 평화와 영화를 만들고, 또 어떤 결혼은 전쟁과 파괴를 부릅니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은 전자로 시작해 후자로 끝을 맺습니다. 엘레오노르가 이후 이웃 나라 라이벌인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입니다. 오늘은 그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루이 7세와 엘레노오르의 결혼식. 14세기 작품.
유럽의 1등 신부감 엘레오노르 쟁탈전
“유럽에서 제일가는 신부.”

엘레오노르가 두 왕국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유럽 명문가의 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기욤 10세의 자녀로 1122년 태어났습니다.

기욤 10세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실력자로 통했습니다. 중세 유럽은 봉건제도를 택하고 있었기에 각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영주들이었지요. 아키텐과 푸아티에는 프랑스의 ‘빵바구니’라고 불릴 정도로 농업 생산량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국토 3분의 1을 지배했기에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영국 화가 프레드릭 샌디스가 1858년 그린 ‘엘레오노르 여왕’. 그녀는 후대에도 깊은 영감을 줄 정도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아키텐 공국은 부유했고,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운 지역이었지요. 엘레오노르 역시 교양이 높고,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미모와 부, 권력 모든 걸 가진 알파걸 중의 알파걸이었지요. 기욤 10세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엘레오노르는 상속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전 유럽의 군주들이 그녀와 혼인하기 위해 열렬한 구애를 펼친 배경이지요.
13세기에 묘사된 엘레오노르.
승자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세자 루이 7세
프랑스의 카페 왕조(커피숍 이름 아닙니다) 역시 엘레오노르는 놓칠 수 없는 카드였습니다. 엘레오노르가 지참금으로 옥토인 아키텐과 푸아티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여 다른 나라의 군주와 결혼하기라도 하면, 프랑스의 ‘빵바구니’가 타국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프랑스의 왕 루이 6세는 아들이자 왕세자인 루이와 엘레오노르의 혼인를 추진합니다. 기욤 10세가 승낙하면서 세기의 결혼이 성립됐지요. 기욤 10세는 본인이 죽은 뒤 신하들이 그녀를 배신할까 염려했습니다. 프랑스 왕가를 뒷배경으로 삼아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프랑스 푸아티에 ‘정의의 궁전’. 아키텐 공작이 거주했던 궁전으로 당시 문화적 수준이 유럽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저작권자=Christophe.Finot>
1137년 7월 25일 세기의 결혼이 열렸습니다. 보르도의 생앙드레 대성당에서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합니다. 혼례 후 한달이 채 지나 지 않아 루이 6세가 사망합니다. 왕세자 루이는 루이 7세로 즉위합니다. 엘레오노르는 왕비가 되었지요. 프랑스 카페 왕조의 미래는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었다
모든 게 탄탄대로처럼 보였습니다. 박학다식하고 영리한 왕, 그리고 아름다운 왕비. 동화에서나 보던 그림이었지요.

하지만 속은 곪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루이 7세는 프랑스 북부인 일드프랑스 나고 자랐습니다. 날씨처럼 다소 차갑고 냉정한 면이 있었지요. 반면, 엘레오노르는 정 반대였습니다. 따뜻하고 온화한 아키텐에서 문화적으로 풍부하고 개방적으로 자랐던 것이지요. 물과 불의 결혼이나 다름없었던 셈입니다.

엘레오노르가 루이 7세에게 결혼 선물로 준 크리스털 꽃병. 그의 부를 가늠하게 하는 물건이다.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
엘레오노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왕이랑 결혼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수도승과 혼례를 올렸다.” 그녀가 얼마나 감정적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2차 십자군 원정에서였습니다. 두 사람이 십자군 성지 중 하나인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이곳의 영주는 엘레오노르의 삼촌인 레이몬드 드 푸아티에였습니다.

“전하, 엘레오노르 왕비는 어디 계신지요?” 안티오키아에서 루이 7세를 영접하는 레이몬드 드 푸아티에. 레이몬드는 이곳에서 자신의 조카인 프랑스 왕비 엘레오노르와의 불륜설의 중심에 섰다.
여기서 두 사람의 불륜설이 터져 나옵니다.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프랑스 북부 문화에 익숙한 왕가의 신하들이, 남부 프랑스의 개방적 태도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15년만에 끝난 결혼
루이 7세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상항도 여기에 불을 지폈지요. 두 사람은 성지로 출정을 나갔을 때 함께였으나, 돌아올 때는 홀몸이었습니다. 십자군 출정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지요. 국정도, 가정도 모든 게 엉망이었습니다.

엘레오노르는 참지 않았습니다. 노골적인 비난을 견딜 만큼 그녀는 차분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집안 출신인 만큼 남편의 말이라고 곧이곧대로 듣지도 않았지요. 설사 그게 프랑스의 왕일지라도.

교황에게 혼인 무효를 청하고 있는 엘레오노르.
엘레오노르가 직접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이혼 아니 혼인 무효를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이 7세와 자신이 10촌간 친척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가톨릭은 이혼을 금하고 있었기에, 이를 우회할 방법으로 혼인무효라는 편법을 쓰곤 했었지요.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처음엔 이를 거절했으나, 결혼이 파탄 났다고 생각한 루이 7세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결혼이 공식으로 무효로 선언됩니다. 1152년 3월, 결혼한 지 15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유럽 전역을 흔든 엘레오노르 ‘2차 쟁탈전’
‘혼인 무효’로 유럽의 지정학적 질서가 다시 뒤흔들립니다. 프랑스 땅의 3분의 1을 다시 얻을 혼인 경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기욤 10세가 결혼 계약서에 아키텐 공국과 푸아티에 백작령 영지를 사위인 루이 7세가 아닌 두 사람의 아들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혼인이 무효로 된 만큼, 이 지참금은 다시 엘레오노르의 몫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녀를 납치해 결혼을 시도한 영주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엘레오노르의 혼인 상대가 헨리 2세랍니다”

루이 7세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재혼 상대로 잉글랜드의 왕세자 헨리 2세를 낙점하면서였습니다. 그는 그녀보다 열 살이나 어렸지요.

헨리 2세와 엘레노오르.
혼인이 무효로 선언된 바로 그 해, 프랑스의 영토이자 엘레오노르의 고향인 푸아티에에서 혼인을 올렸 습니다. 전 남편 보란듯이요. 혼례 2년 후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합니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전(前) 왕비이자, 잉글랜드의 현(現) 왕비라는 전무후무한 스펙을 쌓은 셈이지요.

전 왕비의 재혼이라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영토의 절반을 잉글랜드가 실효지배 하게 되는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잉글랜드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조: 잉글랜드를 제국으로 만든 바이킹)

12세기 후반 잉글랜드 영토. 프랑스의 절반이 잉글랜드의 플랜테저넷 왕가의 소유였다. 이들을 제국이라고 부른 이유였다. <저작권자=amitchell125>
물론 잉글랜드의 왕일지라도 프랑스 영지에 대해서만큼은 루이 7세에게 충성 서약인 ‘오마주’를 바쳐야 했습니다. 헨리 2세를 루이 7세의 부하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 비록 신하의 신분으로였지만 잉글랜드 플랜테저넷 왕가가 실효지배하게 되는 영토는 프랑스 서쪽을 총괄합니다. 결혼 하나로 유럽의 최대 강자로 떠오릅니다. 후에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100년 전쟁을 벌이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도 이 결혼이 꼽히지요.
“잉글랜드 왕아, 너는 나의 신하다.” 1286년 프랑스의 필립 4세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1세로부터 오마주를 받는 모습. 프랑스 영토 내에서는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건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는 대목.
재혼의 시작도 좋았다
엘레오노르는 10살 연하의 헨리와 뜨거운 사랑을 이어갑니다. 왕위 계승이 가능한 아들도 여럿 낳았지요. 루이 7세가 “아이도 못낳는 왕비”라고 비난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민중은 “비실댄 건 엘레오노르가 아니라 루이 7세였다”며 수군댔지요.

희망은 절망의 씨앗을 품기 마련입니다.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와 아들이 없어서 문제였지만, 헨리 2세는 아들이 너무 많아서 골치였지요.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 다섯, 딸 둘을 낳았지요. 엄청나게 많은 2세를 생산하는 사이에도, 헨리 2세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당신 참 멋있었는데. ”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갈등을 그린 영화 ‘더 라이언 인 윈터’. (1968년 작품)
아들들은 아버지 헨리 2세의 용맹함과 어머니의 호방함을 닮았습니다. 혈기 왕성한 나이가 되자 국정 운영에 참가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못했지요. 왕세자 헨리는 아버지 헨리2세와 공동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헨리 2세의 바람기에 지쳐있던 엘레오노르는 자식 보는 낙으로 살아가지요.
바람둥이 헨리 2세와 그걸 지켜보는 엘레오노르
하지만 헨리 2세는 여전히 혈기 넘치는 왕이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걸 결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지요. 자식들의 훈수를 도저히 견디지 못했습니다. 공동 왕이라는 타이틀은 주었지만, 아무런 권한도 의무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1173년, 헨리 2세를 향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반란 수괴는 다름 아닌, 아들 청년왕 헨리였습니다. 후에 ‘사자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용맹함을 자랑했던 또 다른 아들 리차드도 함께했습니다.

“저 인간이 이제 대놓고 바람을... ”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이야기를 다룬 1968년 영화 ‘더 라이언 인 윈터’에서 헨리 2세가 다른 여인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엘레오노르. <사진 출처=IMDB>
이를 지원했던 사람, 바로 엘레오노르였습니다. 그는 아들들이 권력을 잡기 원했습니다. 자신을 두고 바람 피우고 사생아를 데리고 왔던 헨리 2세를 더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바람 피운 상대 중 한명은 아들 리처드의 약혼녀였던 알리스도 있었습니다. 반역을 일으킨 이유도 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의 뜻대로 역사는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헨리 2세는 여전히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아들들을 격파했고, 아내 엘레오노르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었지요. 1173년부터 1189년까지. 무려 16년에 달하는 세월이었습니다. 아들들은 헨리 2세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엘레오노르는 그러지 못했지요.

헨리 2세가 엘레노오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
믿었던 아들들의 배신…헨리 2세의 죽음
어머니에 대한 아들들의 애정때문이었을까요. 첫 반란이 일어난 지 10년만에 다시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번엔 청년왕 헨리가 동생들과 함께 프랑스의 왕 필립2세와 결탁했지요. 헨리, 리처드, 존 등 헨리 2세의 아들들은 필립 2세의 지원 아래 아버지의 군대를 공격합니다. 적의 적은 친구. 국제 정세에도 통용되는 상식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이는 명백히 ‘매국’이지만, 중세 유럽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습니다.
리처드 1세(왼쪽)와 필립 2세(가운데)는 3차 십자군을 함께 할 정도로 사이가 좋기도 했다. 물론 필립 2세가 리처드1세의 동생인 존의 반란 사주를 도우면서 잉글랜드의 분열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승리는 헨리 2세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쳐있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은 언제나 큰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결국 그는 1189년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왕위를 계승한 건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엘레오노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를 옥에서 풀어준 사람 역시 리처드 1세였지요.
엘레오노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사자심왕 ‘리차드 1세’. 1620년에 묘사된 그림.
계속되는 배신…속 타는 엘레오노르
배신은 배신을 낳는다고 했던가요. 리처드 1세는 용맹했지만, 현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십자군을 나간 사이 또 다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동생 존이었습니다. 리처드는 군사를 돌릴 수 밖에 없었지요. 엘레오노르는 리처드에게 그를 용서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효자였던 그는 이를 받아주었습니다.

1199년 리처드 1세가 이른 죽음을 맞았습니다. 불과 41세의 나이였습니다. 엘레오노르는 살아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봐야했습니다. 후계자도 없었기에, 왕위는 존에게 계승됩니다.

1860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주변에 세워진 리처드 1세 기마상. 그는 전형적인 무사형 왕으로서 잉글랜드인의 사랑을 받아왔다. <저작권자=Mattbuck>
존은 ‘역대급’ 암군으로 통합니다. 영국 왕실에서 존 2세가 없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시는 사용하지 않는 왕호일 만큼 평판이 형편없다는 것이지요.

존이 가장 무능했던 건 역시 전장에서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켰지만, 노련한 필립 2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영지도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지요. 그를 실지왕(Lackland)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제 잉글랜드는 ‘제국’이라는 타이틀을 잃게 됩니다. 잉글랜드가 노르망디를 잃었던 1204년, 엘레오노르는 눈을 감았습니다.

“자식 없을 때가 좋았는데...” 프랑스 퐁텐브로 수도원에 잠든 엘레노오르와 헨리2세. 잉글랜드의 군주인 두 사람이 프랑스 땅에 묻혀 있는 건 그들의 영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ElanorGamgee>
엘레오노르의 멍청한 아들로 인해 민주주의가 싹 텄다
역설적이지만, 민주주의는 암군에 의해 탄생합니다. 존이 마구잡이로 귀족들에게 세금을 걷자,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미 명분을 잃어가던 존은 궁지에 몰립니다. 결국 계약서 하나에 사인을 하게 되지요.

“잉글랜드의 자유민은 법이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을 수 없다.”

1215년 존 왕이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통하는 문서다.
그 유명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였습니다. 모든 민주주의 헌법이 이 문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엘레오노르가 두 번의 결혼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땅의 민주주의도 조금은 늦춰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언제나 역사에 흥미를 돋우는 건 ‘IF’라는 이름의 소금입니다.
대헌장에 서명한 러니미드 평원. 현재 이곳에는 미국 변호사협회가 헌정한 상이 놓여 있다. <저작권자=Antony McCallum>
<네줄 요약>

ㅇ엘레오노르는 프랑스 루이 7세와 헤어진 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재혼했다. 양국의 왕비를 거친 최초의 여성이었다.

ㅇ헨리 2세와 재혼 후 잉글랜드는 ‘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ㅇ그녀의 지참금인 아키텐 영지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넘어가면서다.

ㅇ하지만, 아들(존 왕) 잘 못 둬서 도로 프랑스에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싹을 틔웠다.

<참고문헌>

ㅇ앨리슨 위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루비박스, 2011년.

ㅇ앙드레 모루아, 영국사, 김영사, 2013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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