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 나의 사적인 이야기: 2화 [이환주의 아트살롱]
'이환주의 아트살롱' 지난번 글에 아이디 'shle****'님이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았다.
"젊을 때 '상실의 시대'를 읽고 소나기의 성인버전을 본것 같았고, 매해 다시 읽었고, 다시 읽을때마다 나의 나이듦에 감성이 다르게 또 읽힙니다."
가끔 우연으로 뭉쳐진 이 세계가 사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왕왕 숨겨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빅뱅이 생기고 우주가 탄생한 것처럼 내 글쓰기에도 시발점이 있다면 그것은 '소나기'일 것이다.
소나기를 좋아하고,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던 필자는 20년 뒤에 기자가 돼서 하루키와 관련된 글을 썼다. 그리고 이 글을 본 어떤 독자는 '상실의 시대'가 '소나기'의 성인버전 같다고 남겼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 소나기의 뒷 이야기를 쓰는 수행평가 과제가 있었다. 과제 제출 기간이 끝나고 어느 날 국어 시간, 국어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수행평가 과제 중에 매우 잘된 친구의 작품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읽어줄게요."
그리고 국어 선생님은 내가 제출한 소나기의 후일담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주셨다.
국어 선생님은 우리 반은 물론 선생님이 담당하셨던 다른 반에 들어가서도 같은 일을 하셨다.
38년 인생을 살면서 내가 들었던 말(칭찬) 중 언제나 베스트 3에 꼭 드는 말이었다. 당시에 나는 매일 학급일지를 쓰고, 수업이 끝난 뒤 담임 선생님의 도장을 받는 일을 했었는데, 그 글을 쓰고 교무실에 가니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글을 재미있게 봤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 중에는 남자만 있는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영어 선생님도 있었다. 영어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나중에 한 번 소설을 써봐"라고 말씀해 주셨다. 당시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소나기의 마지막 문장은 아래와 같다.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 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소설 '소나기' 中>
중학교 1년, 14살의 나는 아래와 같이 썼다.
소년은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소년은 그 길로 뛰쳐나와 소녀의 집으로 달렸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에서는 피가 흘렀다. 소녀의 집에서 나는 곡소리를 듣고 소년은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개울의 얼음이 녹고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던 소년의 얼굴은 매우 핼쑥했다.
소년은 오늘도 소녀의 집에 가 보았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집이 소란했다. 비어 있었던 그 집에 누군가 이사를 오는가 보았다. 소년은 무심코 대문 안을 내다 보았다. 웬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무색하여 얼른 돌아서서 개울로 갔다.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 만지면서 눈물을 훔쳤다.
"얘, 너 여기 사니?"
돌아보니 아까 그 소녀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무 어색한 소년은 소 풀 뜯기러 가야 된다고 하며 돌아와 버렸다.
"내일 또 만나자."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소년은 맑은 목소리의 소녀와 어느 정도 가깝게 되었다. 작년 소녀가 죽고나서 처음으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었다. 맑은 목소리의 소녀는 죽은 소녀와 매우 닮은 듯 했다. 밝은 성격과 활발한 태도가 그랬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바로 튼튼해 보이는 몸이었다. 이 소녀는 매우 건강했다. 유난히 소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맑은 목소리의 소녀와 어울리며 봄을 보낸 소년은 여름이 다가오자 죽은 소녀를 점점 잊어갔다.
어느 날 소년은 맑은 목소리의 소녀와 함께 산에 올라갔다. 지난 가을의 추억들이 떠올라서 눈물이 났다. 소녀의 목소리와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소년은 양지 바르고 들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는 곳을 팠다. 그리고 소녀가 던졌던 조약돌을 묻었다.
"그게 뭐니?"
다가와 묻는 맑은 목소리의 소녀에게 소년은 "으응, 그냥 꽃씨야."라고 대답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얼른 뛰어서 산을 내려왔다.
이듬 해 봄에 그 자리에서는 소녀가 좋아했던 보랏빛 제비꽃이 아무도 모르게 피어났다.
14살 소년은 6년 뒤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된다. 그리고 스무살에 '고양이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짧은 소설을 하나 쓰게 된다. 그리고 9년 뒤에 한 경제지의 기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에 서른 여덟살이 된다. 그는 지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있다.
#소나기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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