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현장을가다] (17)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달동네

백도인 2023. 9. 9.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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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아픔 '부산 아미동'…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의 열악한 환경
노후 건축물 비율도 95%…주민 70%나 줄며 노인들만 마을 지켜
공동 화장실·빨래방·샤워장 만들고 빈집 매입해 게스트하우스 조성

[※ 편집자 주 = 현대 도시의 이면 곳곳에는 쇠퇴로 인한 도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산업구조 변화와 신도시 개발, 기존 시설의 노후화가 맞물리면서 쇠퇴는 갈수록 빠르고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쇠퇴한 도시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주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도시 경쟁력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도시재생은 쇠퇴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그치지 않고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도시의 재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도시 재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연합뉴스는 모범적인 도시재생 사례를 찾아 소개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아미동과 초장동 일대 사진 [부산시 서구 제공]

(부산=연합뉴스) 백도인 기자 = 부산시 서구의 아미동과 초장동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들며 형성된 산동네 판자촌이다. 이후 1960년대에는 가난한 항만 노동자와 철거민들까지 대거 유입되면서 부산의 전형적인 달동네로 자리 잡았다.

이 가운데 아미동 일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있었던 곳이다. 살 곳이 없으니 공동묘지와 화장장 터에까지 움막을 짓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묘지에 썼던 비석과 상석 등이 집과 담장, 마을 계단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었으니 비석이며 상석이며를 가릴 여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아미동은 이런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유네스코 잠정목록으로도 등재돼 있다.

가난한 살림에 묘지 상석·비석으로 집 지어

이 때문에 마을에 제대로 된 집이 있을 리 없었다. 대부분이 화장실도 없는 방 한 칸에 적게는 5∼6명, 많게는 10명 안팎이나 되는 온 식구가 모여 살아야 했다.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있으니 통풍이나 채광 역시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침마다 아랫마을에 내려가 물을 길어다 밥을 지어야 했고, 물이 귀해 쌀 씻은 물로 세수를 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아미동의 집 담에 남아있는 상석과 비석들 [촬영 = 백도인 기자]

골목은 사람 하나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 데다 경사가 심해 발이라도 헛디디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만큼 위험천만했다. 장기간의 공공개발에서도 소외돼 가로등이나 공원, 광장 등의 기초적인 생활 인프라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주민들의 고단했던 삶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집 자체가 워낙 좁은 데다 마당 한 평 없으니 설령 돈이 좀 생겨도 화장실이나 샤워장, 세탁 공간을 새로 만들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마을에 몇 개 없는 공동 화장실을 나누어 쓰는 게 가장 큰 고역이었다.

마을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는 배영자(97) 할머니는 "하루 밥 세 끼 먹는 것도 힘들었고, 샤워는 꿈도 못 꾸었던 그런 때였다. 지금도 우리끼리 모여 앉아 옛날얘기를 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으로 고단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고령화로 속출하는 빈집 매입해 마을 공동시설로

열악한 환경에 젊은이들이 먼저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4만9천명을 넘어섰던 주민은 2018년 1만3천여명으로 줄었다. 명색이 대한민국 제2의 도시에 있는 마을인데 인구가 70% 이상 급감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떠난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2019년을 기준으로 65세 이상 노인 비율이 부산시 평균 19%의 배나 되는 38%대에 이른다.

그리고 그 노인들이 세상을 뜨면 집은 그대로 빈집으로 남았다. 마을 곳곳에 빈집이 생기면서 주거환경은 더욱 열악해졌다. 지은 지 20년이 넘은 노후주택과 불량 건축물의 비율도 95%가 넘었다. 무허가 건축물도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말 그대로 소멸 위기가 목전에 닥쳤다.

아미동의 좁은 골목 [촬영 = 백도인 기자]

2017년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됐다. 당시로서는 도시재생이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면적인 재개발이나 재건축 자체가 불가능한 지리적 여건과 주택 구조, 마을 형태 때문이었다.

부산시 서구는 가장 먼저 '마을 베란다 공동 이용장 조성사업'에 착수했다. 빨래를 하고 화초를 키우는 아파트의 베란다와 같은 역할을 할 공동 시설을 만드는 사업이다. 빈집을 매입해 마을 중간중간에 이를 설치했다. 마을 베란다는 주민이 가장 필요로 하는 빨래방과 샤워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은 옥외 테라스로 구성됐다. 공동 화장실도 공간을 넓히고 현대화했다. 용변이 급한데 긴 줄을 서야 해 진땀을 흘리는 일은 이제 더는 없었다.

김형원 부산시 서구 창조도시과 주무관은 "워낙 골목이 좁아 당시 세탁기와 건조기들을 들여오는 데 아주 애를 먹었을 정도"라며 "이 마을을 직접 보지 않으면 주민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마을 골목에 들어선 공동 빨래방 [촬영 = 백도인 기자]

기술 전수한 주민들, 협동조합 만들어 마을 집수리 전담

'마을지기 집수리 사업단'을 만들어 낡은 집을 고쳐주는 일도 시작했다. 이 사업에는 전문인력과 주민뿐만 아니라 지역 봉사단체들도 폭넓게 참여했다. 도배와 장판 교체 등을 무료로 해주고 지붕 수리나 단열 등도 해준다. 사업단은 이제 마을의 집수리를 전담해주는 사회적 경제조직 '징검다리 집수리 협동조합'으로 성장했다.

속출하는 빈집은 '우리 집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했다. 게스트하우스는 멀리서 찾아오는 친척이나 친구 등이 묵을 수 있는 공간이다. 워낙 집이 비좁아 손님 한명 묵을 수 없는 마을의 특성을 고려한 사업이다. 게스트하우스는 마을 회관이 없는 이곳에서 주민 친목 도모의 공간이자 어린이 놀이터의 역할도 한다. 재봉이나 공방과 같은 주민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현재 3개의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으며 반응이 좋아 점차 늘려나갈 계획이다.

빈집은 헐어낸 뒤 마을의 작은 쉼터나 체육공원으로도 쓸 계획이다. 다만 빈집을 어디까지 매입할 수 있을지는 큰 고민거리다. 고령층이 많아 빈집은 지속해서 늘고 있지만 이를 모두 매입하기에는 예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도시재생사업이 이뤄진 아미동 비석마을 [촬영 = 백도인 기자]

어두운 마을 골목에는 법무부의 셉테드(범죄예방 환경개선) 사업과 연계해 가로등과 안심 벨 등을 설치했다.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마을을 관광 자원화하기 위한 사업도 본격화했다. 중심 도로인 아미로를 탐방로인 근대역사 테마 거리로 만들고 피란민 시절의 마을 형성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피란생활 박물관'을 조성했다. 공동묘지 위에 만들어진 마을 역사를 고려해 작은 추모공간과 역사광장도 설치했다. 주민 자립 터전인 체험시설과 카페 등을 만들고 청년 마을기업의 설립도 지원하고 있다.

주민 이옥주(75) 할머니는 "그 시절의 고생은 말로 다 못 한다. 이제는 수돗물도 나오고, 그런대로 길도 넓어지고, 빨래도 마음대로 하고, 예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개벽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렇게라도 살 만하게 해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주민 자생모임들과 긴밀한 협력으로 성공사례 일궈

아미동과 초장동의 도시재생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것은 주민과의 긴밀한 협력 덕분이기도 하다. 부산 서구는 사업 초기부터 아미동 어머니들의 자생 모임인 '아미맘스'와 협조체제를 갖추고 주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업들을 발굴해냈다. 골목 빨래방과 집 수리단, 마을 창작공방 등은 모두 아미맘스의 건의를 토대로 진행된 사업들이다. 마을이 처한 사정과 주민의 요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만큼 만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미동의 좁은 골목길 [촬영 = 백도인 기자]

사업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것도 아미맘스의 몫이었다. 아미맘스는 어르신들의 모임인 '그랜드맘스' 등과 함께 연계해 매년 주민 주도형 마을축제인 '아미동에서 놀자'를 열며 주민의 결속력을 높이는 활동도 하고 있다.

지역 청소년단체인 '욜로', 어린이 마을탐험대 등도 청소년과 어린이의 눈에서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찾아냈다. 이런 도시재생사업을 거치며 주민들은 이제 관광객에게 마을을 안내하는 해설사로 활동할 만큼 자부심이 높아졌다.

100억원이 투입된 아미동과 초장동의 도시재생사업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한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 턱없이 부족한 약국이나 편의점 같은 상점들이 확충돼야 한다. 소규모 쉼터나 문화시설도 필요하다. 끊이지 않는 인구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방안도 서둘러 마련돼야 한다.

김형원 주무관은 "워낙 열악한 주거환경에 취약계층이 밀집해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정주 여건을 개선하고 마을 경제를 활성화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다"면서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마을의 관광 자원화와 주민공동체 활성화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doin1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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