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테크] 가상공간 속 제주 도로서 1000배 연습했다...국내 최장 자율주행 코스 탄생의 비결
美 어플라이드 인튜이션과 협업으로 자율주행 완성도 높여
가상공간에서 비용·시간 절감… 돌발 상황 테스트까지 가능
지난 6일 오후 2시 제주국제공항 청사는 때마침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들로 몹시 붐볐다. 인파를 지나 청사를 나서자 ‘라이드플럭스’ 로고를 붙인 채 기다리는 승합차 한 대가 눈 앞에 들어왔다. 이날 기자가 타고 중문관광단지까지 이동할 자율주행차였다. 라이드플럭스는 제주공항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자율주행 셔틀 서비스를 운행하고 있다. 주행거리가 편도로만 38㎞로 국내에서 가장 긴 자율주행 코스다.
제주국제공항 진출로 근처에서 공사가 진행 중인 탓에 공항을 빠져나갈 때는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본격적인 자율주행은 공항을 나서자 시작됐다. ‘자율주행을 시작합니다’라는 음성 안내와 함께 사람이 운전대에서 손을 놨고 차량은 시속 30㎞의 속도로 움직였다. 공항을 빠져나온 차량들이 복잡하게 얽혔지만 자율주행차는 도로 상황에 맞춰 천천히 차선까지 바꿔가며 움직였다. 제주 시내에서도 차량이 가장 많기로 소문난 노형동까지 자율주행차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뒷좌석에 설치된 디스플레이 화면을 통해 정밀하게 인식된 도로와 주위의 차량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드플럭스의 자율주행차는 라이다 센서와 카메라를 함께 사용해 주변 환경을 인식했다. 함께 차량에 탑승한 라이드플럭스의 김소현 엔지니어는 “신호등을 카메라로 인식하고 나머지는 라이다를 통해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연결하는 평화로에 진입하자 자율주행차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시속 80㎞까지 속도를 높이며 주위의 차량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정적인 주행을 선보였다. 자율주행차가 고속 주행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오히려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도로에서 더 안정적이었다.
제주시로 돌아오는 길에는 돌발 상황도 있었다. 노형로타리를 앞두고 옆 차선에 있던 차량이 무리하게 끼어들기를 하면서 자율주행차가 급정거를 했다.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어도 깜짝 놀랄만한 상황이었지만, 자율주행차는 빠르게 속도를 줄인 뒤 끼어들기를 한 차와 거리를 유지했다.
자율주행차가 이런 돌발 상황에도 문제 없이 대처할 수 있는 비결은 ‘가상 공간’에서의 테스트에 있다. 김소현 엔지니어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가 다양한 돌발 상황을 겪어보고 실제로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결할지 미리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테스트를 하는 게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가상공간에서 1000배 많은 테스트… 위험 상황도 미리 학습
자율주행차의 핵심은 차의 두뇌 역할을 하는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가 도로 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미리 학습하고 그에 맞춰서 적절히 대응하는 게 자율주행 기술의 핵심이다. 지금까지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차의 두뇌 역할을 했다면 자율주행 시대에는 소프트웨어가 사람을 대신해 두뇌 역할을 맡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학습’이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가 도로 상황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변수와 돌발 상황을 미리 학습해서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 라이드플럭스가 제주를 자율주행의 무대로 삼은 것도 학습의 용이성 때문이다. 김소현 엔지니어는 “제주는 시내가 복잡해서 시내주행을 경험할 수 있고 평화로처럼 고속으로 주행할 수 있는 도로도 있다”며 “한라산이 있어서 날씨도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에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압축적으로 경험하기 좋은 곳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제주라고 해도 학습이 불가능한 상황은 있다. 안전과 직결되는 경우다. 사람이 무단횡단을 한다거나 갓길에 있던 차량이 갑자기 도로에 끼어든다거나 하는 상황을 실제 도로에서 테스트 삼아 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등장하는 게 ‘가상공간’이다. 실제와 똑같은 환경을 가상공간에 구축한 뒤에 가상공간에서 수많은 테스트를 통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학습시키는 것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있는 어플라이드 인튜이션(Applied Intuition)은 이 분야의 세계적인 강자다. 자동차 회사인 GM와 글로벌 IT 기업인 구글에서 모두 일한 경험이 있는 카사르 유니스가 2017년 만든 어플라이드 인튜이션은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학습시키는 다양한 플랫폼을 제공하는 회사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20대 자율주행 기업 가운데 17곳이 어플라이드 인튜이션의 플랫폼을 이용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학습시키고 있다. 설립 7년 만에 기업가치는 36억달러(약 4조2500억원)에 달한다. 국내에서는 라이드플럭스 외에 LG전자 같은 대기업이나 경찰청 치안정책연구소 같은 공공 연구기관도 어플라이드 인튜이션의 플랫폼을 쓰고 있다.
오주용 어플라이드 인튜이션 한국지사 사업개발 이사는 가상공간에서의 테스트가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설명했다. 오 이사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 입장에서는 최대한 실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다양한 변수를 넣고 테스트를 진행하고 싶어한다”며 “예를 들어 자율주행차가 호텔 정문으로 진입할 때 갑자기 택시가 끼어든다거나 사각지대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걸어나온다거나 하는 상황에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실제 호텔에서 구현할 수 없지만, 가상공간에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적용하면 얼마든지 테스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감독이 카메라까지 만들 필요는 없어… 협업으로 자율주행 앞당긴다
가상공간을 활용한 테스트는 실제 차량을 이용하는 것보다 비용과 시간을 크게 절감하는 효과도 있다. 오 이사는 “가상공간 시뮬레이션을 이용하면 실제 주행하는 것보다 최대 1000배까지 많은 주행 테스트를 할 수 있다”며 “수집된 데이터를 자동화해서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바로 검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이 직접 가상공간을 구축하고 테스트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라이드플럭스도 초기에는 내부 개발진이 테스트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가상공간을 구축하고 운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보다는 플랫폼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업과 협업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소현 엔지니어는 “이런 검증툴을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자체적으로 만든 플랫폼의 UI(인터페이스)나 UX(사용자경험)도 완성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며 “플랫폼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우리 엔지니어들은 소프트웨어의 완성도를 높이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플라이드 인튜이션은 스스로를 영화 감독이 사용하는 카메라를 만드는 회사에 비유한다. 영화 감독은 카메라를 이용해 좋은 작품을 만들면 되지, 영화 감독이 카메라까지 직접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에게 카메라 같은 플랫폼을 제공하는 게 어플라이드 인튜이션의 과업이라는 설명이다.
어플라이드 인튜이션은 테스트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가상공간 환경을 구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를 한꺼번에 제공하고 있다.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에 필수적인 지도 제작부터 데이터 분석, 실제 차량이 거리를 달리면서 모은 영상과 데이터를 가상 환경으로 바꿔주는 서비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양한 상황을 테스트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한꺼번에 제공한다.
오 이사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과정별로 필요한 모든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어플라이드 인튜이션의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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