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백석이 사랑한 ‘여름의 총아’ 맥고모자
‘여름!여름! 벌써 여름이다. 거리에는 맥고모자 쓴 사람들과 ‘파라솔’(여름우산)든 부인들의 왕래가 잦으니 바야흐로 맥고모자의 시절이오, ‘파라솔’의 시절이다.’(‘初夏가두풍경’, 조선일보 1930년5월9일)
100년 전 ‘맥고모자’는 여름의 대명사로 통했다. 여름철이 다가오면 이런 기사가 종종 실렸다.’비가 개이고 한 이틀 동안 바람이 불고나서는 날이 훨씬 풀리어 완연 여름날이 되었다 ▲어색해보이던 흰 구두며 맥고모자도 조금도 어색한 빛이 없이 아주 서늘해 보인다 ▲역시 이것도 때가 온 것을 말하는 것인데 때를 맞춰야할 것은 흰 구두에 맥고모자뿐이 아니라…'(‘색연필’, 조선일보 1938년5월19일)
오죽하면 ‘여름은 맥고모자로부터 시작된다’거나 ‘푸른 하늘 아래 연록색의 플라타너스 잎이 활짝 퍼진 넓은 빌딩가의 거리로 눈이 부시게 흰 빛의 초출 맥고모자를 쓰고 거니는 젊은이의 모양은 첫 여름 거리의 즉흥시가 아닐 수 없다’ (’초하(初夏)의 즉흥시’ 맥고모, 조선일보 1937년6월27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보릿짚 또는 밀짚으로 만든 맥고모자는 시원한데다 값까지 비교적 부담없어서 ‘모던 보이’들이 선호했다. 밀짚모자하면 농부나 노동자의 땀내나는 허름한 모자를 떠올리지만, 산뜻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고급 ‘맥고모자’는 지식인과 모던 보이들의 사랑을 받은 패션소품이었다. 소설가 엄흥섭이 ‘여름엔 산뜻한 파나마모자나 그렇지 않으면 맥고모자라도 써야만 계절에 어울리는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소하잡기’ 冬帽 夏帽, 조선일보 1936년7월4일)이라고 쓸 만큼 맥고모자는 파나마모자와 함께 여름의 필수품이었다.
◇'맥고모자’시인 백석
멋쟁이 시인 백석(1912~1996)은 맥고모자 예찬론자였다. 백석은 수필 ‘동해’(동아일보 1938년6월7일)에서 맥고모자를 여러 차례 거명한다.
‘동해여-오늘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 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 내음새 풍겨오는데…’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친구를 생각하기는 그대의 언제나 자랑하는 털게에 청포채를 무친 맛나는 안주탓인데….’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전복에 해삼을 생각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습네.’
함흥 영생고보 교사시절 발표한 이 수필을 읽으면, 무더운 여름밤 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며 신나게 거리를 누비는 스물 여섯 시인의 흥겨운 모습이 떠오른다. 털게와 청포채, 전복, 해삼 등 맛난 안주들을 떠올리며 친구를 생각하는 백석의 순정도 애틋하지만, ‘맥고모자’도 덩달아 뇌리에 박힐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50전에서 2원50전까지
1930년 기준 맥고모자는 최하 50전부터 2원50전까지 했다.(‘初夏가두풍경’, 조선일보 1930년5월9일) 제일 싼 것도 15전짜리 설렁탕 서너 그릇값이었고, 비싼 건 다섯배가 넘었으니 싸구려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만만한 패션소품이었던 것같다. 엄흥섭은 ‘칠팔십전이나 많아야 일원쯤 던지면 일년 쓰고 내버려도 과히 아깝지 않을 허름한 맥고모자쯤은 살 수야 있다’(‘소하잡기’ 冬帽 夏帽, 조선일보 1936년7월4일)고 했다.
맥고모자의 상위품은 파나마모자였다. 1930년 기사에 따르면 파나마모자 값은 최저 1원30전부터 최고 11원50전까지 편차가 컸다.맥고모자보다 훨씬 고급품이었던 셈이다. 엄흥섭이 ‘삼사원쯤 빚을 내서라도 파나마모 한 개쯤 사쓰지 못할 내 아니었만’이라고 쓴 걸로 보아, 꽤 사치품이었던 것같다.
맥고모자 스타일도 해마다 조금씩 달라졌던 모양이다. ‘금년이라고 유행이 별로 달라진 것은 없으나 챙이 좀 더 좁아지고 리본도 좀 더 가늘어들었답니다.그리고 리본 빛깔은 아무래도 다색(茶色)계통이 우세한 모양인데, 젊은 분네중에는 검은 빛도 찾는 이가 많답니다.’(‘그리운 흰 빛, 산뜻한 맥고모자’, 조선일보 1936년5월7일)
◇파나마모자의 유래
‘파나마 모자’는 파나마산(産)일까. 당시에도 궁금한 사람이 많았던 것같다. 신문에 해설기사까지 났다. ‘파나마모자는 그저 파나마라는 나라에서 나는 것으로 아시지만은 남양 마르날군도로부터 대만이나 류구 등지에서도 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남양의 야자(椰子)입사로 된 것은 3원50전에서 7원 정도로 가고 류구서 나는것은 8원 이상 60~70원까지 있고 일본, 파나마, 컬럼비아 등은 8원 내외입니다’ (‘그리운 흰 빛, 산뜻한 맥고모자’, 조선일보 1936년5월7일)
파나마 모자의 원산지를 에콰도르, 콜럼비아, 페루라고 밝힌 기사도 있었다. ‘파나마는 어데서 만드느냐고 하면 보통 파나마-저 유명한 파나마 운하(運河)가 있는-에서 산출하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그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의 ‘에크아돌’ ‘콜럼비아’ ‘페루-’이고 ‘파나마’는 그것이 매매되는 곳입니다.’(‘첫 여름의 패션쇼’-여름모자, 동아일보 1934년5월17일) 파나마는 유통 중심지이지 생산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시중에는 싸구려 파나마 모자도 많이 유통됐다. 종이로 만든 파나마 모자는 비를 맞으면 망가져서 ‘싼 것이 비지떡’이라고들 했다.
◇남자 분실물 1위 맥고모자
여름을 대표하는 남성 패션의 상징, 맥고모자는 분실품 순위 선두에 꼽히는 물건이었다. 모자를 벗었다 다시 챙기는 걸 깜빡하는 도시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1939년 본정서(本町暑) 유실물창고에 보관된 물품 12만점 중 맥고모자와 양산이 4000점씩 차지해 가장 많았다고 한다.(‘도회인은 건망증’, 조선일보 1939년1월24일) 여자는 양산, 남자는 맥고모자가 압도적이었다.
여름철 기차 승객이 남기고 간 분실물 중에도 맥고모자가 두드러졌다. ‘경성역은 예년과 같이 잃어버린 물건 처리에 눈코 뜰 사이 없는 형편이다. 더위로 정신이 빠진 탓인지 열차 발착 시각에 대합실 또는 열차안에 잊어버린 물품은 맥고모자를 필두로 파라솔, 핸드백, 보구미(바구니의 강원도 사투리), 트렁크, 단장 등이 거의 매일 발견되어 지난 6월19일의 18건은 최근의 기록이고 7월에 들어서는 닷새 동안에 39건이 생기고, 5일은 12건으로 더위와 물건 잊어버리는 것과는 떠날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듯하다.’(‘더위와 건망증’, 조선일보 1933년 7월8일)
여름철 분실물은 찾으러 오는 사람도 적어서 역무원들은 분실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 기사는 ‘인심이 각박한 이 때에 거의 임자가 나설 터인데 여름 인심은 평소보다 너그러워지는 법이라 할까?’라고 슬쩍 어깃장도 놓지만, ‘역 당국에서는 처치에 곤란하야 더위에 시달리는 여객의 건망증을 근치할 방법이 없는가 고심하’고 있다고 마무리했다.
◇'한여름만 지나면 소박데기 신세’
‘여름의 총아’도 무더위가 지나면 쓸모 없어졌다. ‘아무리 좋은 맥고모자라도 일년만 쓰면 그만입니다. 말이 일년이지 한여름밖에 안되는데 멀쩡한 놈도 빛깔이 누렇게 되는 통에 더 쓸 자미가 없어집니다’(‘한여름만 지나면 소박데기 신세’. 조선일보 1934년 7월13일)
하지만 내버리기는 아까웠던지 맥고모자 세탁법 기사가 종종 실렸다. ‘과산화소다 가루를 약방에서 한 5전어치 사다가 백배 되는 물에 타서 그 물에 솔을 축여가지고 모자를 또 한번 얼른, 고루고루 문질러 씻으시오. 그 다음에는 맨물로 씻습니다.’(위 조선일보 기사)
이렇게 묵은 때를 씻은 맥고모자는 눈부신 한여름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내년을 기약하며 안방 장롱 신세를 졌다.
◇참고자료
최지혜,경성백화점 상품 박물지, 혜화1117, 2023
백석, 정본 백석 소설·수필, 문학동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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