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신드롬 재현할까…우리 내면의 '벽' '그림자'에 대한 집요한 탐구 [책과 세상]

진달래 2023. 9. 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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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70대 작가, 43년 전 중편 매만져 낸 장편소설
예약판매 기간 베스트셀러 1위로, 3쇄 돌입
소년·상실된 사랑·평행세계…작품세계의 총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출간된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작가의 작품들로 꾸며진 '하루키 월드'가 마련돼 있다. 문학동네 제공

'상실의 시대' '1Q84' 등으로 탄탄한 독자층을 보유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74)가 6년 만에 돌아왔다.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통해서다. 2017년 '기사단장 죽이기'로 불었던 하루키 신드롬이 재현될지가 서점가의 주목거리다. 지난달 28일부터 시작된 예약판매 기간에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온라인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정식 출간일(6일) 이틀 전 이미 3쇄 제작에 들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 따르면 하루 만에 전작 '기사단장 죽이기'의 3일간 판매량을 넘어섰다. 제작 부수가 13만 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작은 하루키의 초기작과 현재가 공존한다는 게 특징이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이래 하루키가 각종 문예지를 통해 발표한 글 대부분이 단행본으로 출간됐는데, 예외적 작품이 중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 문학계)이었다. 바로 이번 신작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작가 후기’) 여겼던 하루키는 코로나19 시기에 이 소설을 매만지기로 결심한다. 경계심이라는 벽을 높이 세우고 그 벽을 허무는 결단은 개인에게 맡기는 팬데믹의 현실이, 벽을 주요 모티프로 삼은 이 작품을 다시 쓰고 싶게 만든 것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신작을 쓰는 데는 3년이 걸렸다. 그렇게 70대의 "숙련된 전업 작가"는, 부족한 필력 때문에 스스로 아쉬움을 느꼈던 청년 시절의 작품을 43년 만에 이리저리 손을 봐 완성했다.

소설의 화자 '나'는 열일곱 살 남고생이다. 화자는 고교생 에세이 대회에서 한 살 아래인 여고생 '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소녀는 믿기 힘든 고백을 한다. 자신은 그림자일 뿐이고 본체는 견고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다고. 계절은 변하지만 '진짜' 시간은 흐르지 않는 그곳에는 책이 아닌 사람들의 꿈이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도시의 중요한 임무는 그 꿈을 해독하는 일이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만 남긴 소녀가 갑자기 사라진 후 주인공은 상실의 아픔을 품고 산다.

이달 6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이날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한 독자가 살펴보고 있다. 문학동네 제공

마흔다섯이 됐을 때쯤 '나'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높은 벽의 도시에서 소녀와 재회한다. 하지만 10대 모습 그대로인 소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버리고 들어간 도시,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이'로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그는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그때 벽 바깥에 떼어 놓고 온 '그림자'가 그를 흔든다. 이 도시는 허상이고 저 높은 벽도 결국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 만든 거짓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면 벽을 뚫고 '현실 세계'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다는 설득에 '나'는 기로에 선다. 어느 세계를 믿을 것인가.

2, 3부는 중년의 화자가 현실로 돌아온 후를 그린다. 그 도시의 기억으로 혼란한 그는 오랫동안 일하던 출판유통회사를 그만두고 산간 지방의 작은 도서관에 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환경을 바꿔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느끼는 혼란은 더욱 심해진다. 미스터리한 전임 관장 '고야스'와 사서 '소에다', 사진 찍듯 모든 책을 읽고 기억하는 'M소년'을 만나면서다. 이곳이 높은 벽의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내가 '돌아온 것'은 맞는지, 또 본체와 그림자가 뒤바뀐 상태는 아닌지 등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끊임없이 경계에 세워진 '나'에게 또 선택의 시간이 온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문학동네 발행·768쪽·1만9,500원

소설에는 하루키 소설 특유의 결이 살아있다. 진실과 허구,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세계에서 인물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점에서 그렇다. 탐구는 더 집요해졌다. 작가 스스로도 속도와 의외성 등을 중요하게 여겼던 젊은 시절과 비교하면 이번에는 '나'가 도서관장으로 일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며 그리는 데 신경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같은 소설에서 출발한 장편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와는 결말이 다르기도 하지만 작가의 집필 태도에서는 차이가 난다. 하루키 작품 세계의 집약체로 볼 수 있기도 하다. 벽과 그림자, 도서관과 지하라는 작가의 오랜 테마가 담겨 있고, 소년을 주인공으로 현실과 유사한 평행세계를 그린 것 또한 익숙한 설정들이다. 특히 자신을 믿는 힘으로만 넘을 수 있는 벽, 본체와 경계를 규정하기 힘든 그림자라는 존재를 통해 작가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하루키 신드롬 재현은 가능할까. 판매량과는 별개로 뻔한 소재의 반복, 빈약한 서사, 왜곡된 여성상, 시대 의식 결여 등 단골 비판들을 극복하고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온전히 인정받는 작품이 될지도 주목된다. 앞서 지난 4월 출간된 일본에서는 상반기 베스트셀러에 등극했으나 거친 서사 전개 등이 아쉽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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