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20] 애정 없는 좋은 말

백영옥 소설가 2023. 9.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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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대학생 때, 친구들과 광고 공모전을 준비한 적이 있다. 나는 카피라이터로 참여했는데 그때 팀의 회의 방식이 독특했다. 한 친구의 제안으로 아이디어 회의 때마다 누군가 한 사람은 계속 의견에 반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회의 중 자기 의견에 딴지를 걸거나 비판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기 마련인데, 이를 방지하고, 우리 아이디어를 과대평가하다가 정작 본선에서 탈락하는 과오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우리 회의 방식이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전략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악마의 대변인’은 가톨릭에서 성인(聖人)을 추대할 때 후보의 결점이나 의심스러운 점을 지적하는 선의의 비판자를 말한다. 모두가 찬성할 때 합리적 반대 의견을 내고 비판적 대안을 제시해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는 장치다.

영화 ‘넘버3′에는 송강호가 이끄는 작은 조폭 집단이 나온다. 어느 날 그가 조직원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며 ‘라면만 먹고 금메달 딴 현정화’ 이야기를 한다. 그때 부하가 현정화가 아니라 ‘임춘애’라고 이름을 정정하자 격분한 그가 “내가 하늘이 빨간색이라고 하면 빨간색이야!”라고 소리 지르며 부하를 폭행한다. 이런 장면은 3류 조직에 특히 빈번하다.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집단은 영화 제목처럼 넘버3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세계적 투자가 ‘레이 달리오’는 반대 의견을 “애사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까지 정의한다. 애사심이 없으면 반대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신작을 출간하며 편집자에게 “듣기 좋은 소리 말고 뼈 때리는 직언”을 해달라고 몇 번이고 말한 이유는, 좋은 책을 만드는 게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러 책을 내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위로를 건네줄 친구는 가까이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내 옆에 두어야 할 친구는 진심으로 애정 있는 쓴소리를 해 줄 수 있는 친구다. 애정 없는 좋은 말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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