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의 순도와 애정의 순도는 비례합니까?

한은형 소설가 2023. 9. 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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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다랭이팜 막걸리

맥주를 액체로 된 빵으로 여긴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빵과 맥주 모두 좋아하는데 빵을 조금 더 좋아한다면서. 빵이 없으면 빵을 먹는 기분으로 빵 대신 맥주를 마신다는 걸 들으니 빵과 맥주가 꽤나 비슷해 보였다.

보리나 밀가루로 만든다는 것도, 구수한 냄새도, 빵빵하게 부풀어오르는 속성도 말이다. 친화력이 좋은 동성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맥주를 마시는 내가 ‘음, 난 지금 액체 빵을 마시고 있군’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액체 빵’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말이다. 빵도 맥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겠지.

아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적확하지 않다. 빵도 좋고, 맥주도 좋다. 그들의 만만함과 느긋함이 좋다. 하지만 ‘좋다’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 이상의 정서가 없다. 밥과 막걸리는 그렇지 않다.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찌르르하기도 하고, 뭔가 많은 감정을 준다. ‘마시는 밥’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빵보다는 밥이고, 맥주보다는 막걸리다.

사건도 있었다. 밥과 관련된 사고였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고 조심성(겁)이 많던 나의 유일한 사고이기도 하다. 잔칫날이었다. 추가 달랑달랑 돌고 김이 폭폭 나는 거대한 압력밥솥을 나도 모르게 안아버렸다. 밥 냄새가 좋아서 그랬다. 내가 안았다기보다는 밥솥이 내게로 와서 안겼다는 느낌에 가깝다. 손오공이 된 내게로 구름이 다가오듯이 거의 ‘두둥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5살 아이 생각에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누가 이해해줄까 싶어서.

남해 다랭이마을에서 만든 다랭이팜 생막걸리./11번가

밥을 사랑했었다. 그랬던 것 같다. 갓 한 밥의 냄새와 촉감, 자르르한 윤기와 느슨히 손을 맞대고 있는 쌀의 점착력 같은 생래적 자질을 말이다. 이제 열렬한 시기는 지났다. 매일 먹지도 않고 먹는다고 해도 조금만 먹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맛있는 음식 중 하나가 쌀밥이다. 여전히 그렇다. 그러니 막걸리에 빠졌던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막걸리를 떠올리면 몸의 어딘가가 찌르르했던 때가 있었다. 마시고 싶어서. 막걸리만 마시던 때였다.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서너 번. 오래전의 일이다. 지금은 막걸리의 시절로부터 떠나왔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왜 어제 같은지.

우연히 갔던 막걸릿집 때문이었다. 입구에 이문재 시인의 ‘사막’이 분필로 적혀 있었다. 그렇게 정색하고 시가 적혀 있다는 것 말고는 미덕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호래기와 도토리묵, 멍게 라면 같은 안주들과 기본으로 내주는 묵은지도 좋았다. 무엇보다 엄선한 스무 종 정도의 막걸리가 있었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막걸리였다. 막걸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장수나 지평 말고도 복순도가 등등의 이런저런 막걸리를 마셔보았지만 거기에는 처음 본 막걸리들이 있었다. 국산 쌀을 쓰고, 감미료를 넣지 않거나 최소화한 것 위주로 골랐다고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전국의 양조장을 다니며 막걸리를 만드는 공정까지 고려했다며. 이런 말을 들으면 좋아서 현기증이 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나다. 나는 그걸 다 마셔보아야 했다.

어떤 막걸리가 맛있는지, 내 입맛에 맞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백 종 정도가 있었다면 그렇게 덤비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스무 병 정도라니 얼마나 가뿐한가. 한 번에 서너 병씩 마신다면 곧 모든 막걸리를 섭렵할 수 있다니 의욕이 샘솟았다.

당시 나의 막걸리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인 데는 사장님의 테이스팅 노트도 한몫했다. 달변가이면서 글도 잘 쓰는 사장님이 혹하는 문장으로 적어둔 테이스팅 노트에 있는 단어들은 나를 자극했던 것이다. 또 충남 홍성, 경기 양주, 전남 담양, 전북 정읍 같은 막걸리의 원산지도. 담양이나 정읍에서 빚은 술을 먹으며 언젠가 그곳의 양조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모든 막걸리를 마셨다. 그 막걸릿집에 있던 막걸리를 말이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다시 한번 나에 대해 깨달았다. ‘판매 1위’라든가 ‘요즘 사람들이 제일 좋아해요’라는 말에 마셔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세상의 권위나 인기는 나의 기호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 만난 막걸리 중에 다랭이팜 막걸리가 있다. 마시자마자 ‘어… 이건 내 스타일인데?’라고 생각했다. 금사빠는 아니다. 첫눈에 이런 생각이 드는 일은 잘 없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음식이나. 미적거리는 편인 내가 평소와 달리 행동력 있게 움직일 때는 확신을 주는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다랭이팜 막걸리를 만난 이후로 다랭이팜 막걸리를 마시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다랭이팜이 보이면 다랭이팜을 마셨고, 양조장에서 주문해서 집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작가 레지던스에 갔을 때도 다랭이팜을 레지던스로 주문해서 다른 작가들과 마셨다.

다랭이팜의 맛은 한마디로 슈퍼 드라이. 드라이하고 산미가 있고 단맛이 없었다. 아니, 다른 막걸리에서 느꼈던 그런 달착지근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단맛 대신 쌀의 단맛이 있었다. 거기에 프루티하다고 할 만한 청량한 느낌. 그리고 맑았다. 너무 맑으면 막걸리가 아닌 청주가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정밀하게 맑음의 정도를 통제한 맑은 막걸리였다. 걸리적거리지 않고 축축하지도 않은 샘물 같은 막걸리랄까.

송명섭 막걸리와 비슷한 데가 있다. 내가 느끼기에 송명섭은 온화한 고집이 느껴지는 맛이라면 다랭이팜은 그보다는 현대적이고 모가 난 맛이다. 과한 뾰족함은 아니고 나긋나긋한 뾰족함이랄지 그런 게 있다. 송명섭이 요거트라면 다랭이팜은 케피르라고 말해야 하려나. 산미가 있으면서 더 맑은 제형의 요거트가 케피르고, 독일에서 지낼 때 나는 매일같이 케피르를 마셨다.

평양냉면 같은 막걸리라며 송명섭 막걸리만 먹는다는 사람도 만났다. 평양냉면도 좋아하고 송명섭 막걸리도 좋아하는 애정의 순도가 전해져서 웃음이 났다. 나도 다랭이팜을 만나기 전에는 송명섭을 주로 먹었기에 우리는 비슷한 입맛이 아닐까 싶었다. 다랭이팜을 이야기할까 하다가 말았다. 그분의 송명섭에 대한 사랑은 강고한 신앙 같았기에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어 보여서.

다랭이팜을 마시다가 다랭이 논을 알게 되었다. 다랭이팜은 남해의 다랭이 마을에서 만들어지는데, 다랭이 논을 찾으면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 따위에 있는 계단식의 좁고 긴 논배미’라는 해설이 나온다. 산을 깎아 만들었기에 45도인 경사인 이곳은 108개의 층층계단으로 된 논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다랭이 논 앞에는 남해 바다가 있다. 다랭이팜은 땅끝의 막걸리이기도 한 것이다.

남해를 가게 된다면 다랭이 논을 보기 위해서일 테고, 다랭이 논에서 나온 쌀로 지은 밥을 먹기 위해서일 테고, 다랭이 논을 보면서 다랭이팜을 마시기 위해서일 텐데 아직 가지 못했다. 다랭이팜을 마시면서 땅끝의 다랭이 논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 여름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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