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깔아주는 멍석은 ‘마법의 양탄자’가 분명하다
[길해연이 만난 사람]
멍석 깔아주는 사람
공연계 수퍼히어로 박명성
돈키호테, 똥배짱, 작은 거인, 불의 전차, 탱크, 마음의 방화범…. 다 신시컴퍼니 예술감독 박명성의 별명이다. 그는 명실 공히 공연계의 수퍼 히어로이자 대표 제작자이다. 물론 그런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의 도전이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망해도 너무 망했다.”
“저 사람 다시 공연 제작하긴 그른 것 같아.”
이런 말을 들을 만큼 처참하게 실패한 적도 꽤 있었다. 그때마다 박명성은 “실패와 성공의 차이는 다시 도전하는가, 거기서 멈추는가 하는 차이다” “마침표는 새로운 문장의 시작이 될 것이다” 등등 멋진 말을 내뱉으며 좀비처럼 우둑 우두둑 뼈를 꺾고 일어나 자신의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렇다. 그는 미쳤다. 공연에 미쳤고 “고작 최초의 꿈을 꾸는 사람”이라 스스로 칭하는 프로듀서 일에 미쳤다. 제작한 공연의 개막일이 임박해서는 머리와 위가 붙은 사람처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공연을 볼 때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들킬까 봐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극장 벽에 기대 서서 관람하는 것이 습관이 돼 버렸으면서도 그는 무모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는지 그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자책한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생각했던 자신이 무진장 게으른 사람같이 느껴지고, 목표도 없이 그냥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그렇게 공연 제작에 미친 그에게 나는 별명 하나를 더 붙여 주었다.
“멍석 깔아주는 사람.”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일 자리를 만들고 판을 깔아준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보라고 기회를 마련해주고 자신은 스윽 뒤로 물러서 지켜보다가 잘되면 손뼉을 치고 못되면 그들의 바람막이가 되어 수습한다. 깔아 놓았던 멍석을 둘둘 말아 들고 다음 판을 찾아 미련 없이 길을 나선다.
단지 공연을 준비할 때만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연극에 관련된 일이 생기면 먼저 달려와 멍석을 깔아준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내가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한숨만 폭폭 쉬고 있을 때였다. 이사장부터 이사 모두 무료 봉사로 어려운 연극인들을 돕겠다고 모이긴 했지만 자금 마련이 문제였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기부는커녕 지원을 받아도 시원찮을 사람뿐인지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려운 일을 맡으셨더구먼. 봅시다. 내가 자리 한번 만들어볼게.”
그렇게 그는 나의 구세주이자 연극인복지재단의 굵고 긴 동아줄이 돼 주었다. 당시는 코로나 여파로 신시 공연들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염치 불고하고 그가 깔아준 멍석에 냉큼 올라앉았다.
그는 연극인복지재단이 뭐 하는 곳인지 하나도 안 궁금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뜬금없이 옛날옛날 옛적에 나한테 신세를 졌다며 ‘의리 있는 연극계 큰언니’라고 나를 추켜세웠다.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가 나에게 신세를 졌다 할 만한 일이 없는데 그는 백번을 잊어버려도 아쉽지 않을 기억을 끄집어내어 나라는 사람을 제법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가 깔아준 멍석에 같이 앉아 있던 분들이 바로 다음 날로 기부금을 연극인복지재단으로 보내줬고 심지어는 옆에서 회를 썰어 주다 우리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배정철 어도’ 사장께서 “저도 동참해도 되겠습니까?” 하더니 3년 동안 연극인 자녀 장학금을 보내주었다.
그가 깔아주는 멍석은 마법의 양탄자가 분명했다. 그 뒤로도 신시 이름으로 많이 지원해줬고 바빠서 한동안 뜸하구나 할 때쯤이면 먼저 전화해서 “좀만 기다리쇼. 내 곧 자리 만들 테니. 아따, 두 집 살림 하느라 힘들구먼” 하며 껄껄껄 웃었다.
뮤지컬 ‘맘마미아!‘, 연극 ‘토카타‘ 같은 공연 제작에 연극인복지재단 일까지 두 집 살림을 자청해서, 사서 고생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도움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짠해졌다. 너무 큰 도움을 받아 감사의 마음을 다른 이들한테도 전하고 싶어 박명성 이름을 넣을라치면 그는 불에 덴 사람처럼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뭐지? 이 사람은?
고마움이 커지니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뭣 때문에? 대체 왜?
먼저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닌데 그는 왜 발 벗고 나서서 자리를 만들고 판을 벌이는 걸까? 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는 연극을 사랑한다. 그것도 미치도록. 그래서 연극계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해보겠다고 나선 무능력한 이사장에게 아무 대가 없이 뒤에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전남 해남 저 먼 곳에서 가슴에 연극으로 산불이 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배우가 되겠다고 그 고생을 하면서 연기보다는 라면을 잘 끓이던, 재능은 없었지만 무진장 열심히 공부했던 배우 지망생 청년이 조연출, 무대 감독을 거쳐 제작자가 되어 “그래도 꿈을 꿀 수 있어 행복했다”며 연극 하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는 공연 제작자 박명성을 축하하러 갈 것이다. 그를 위한 멍석이 펼쳐지는 오늘, 나는 멍석 저 끝 쪽에 서서 그를 위해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드림 프로듀서’라는 책 어디쯤에 써놓은 말을 가슴 벅차게 떠올릴 것이다.
“연극은 나에게 즐거움이자 고통이며 좌절이자 구원이다. 가장 암울했던 시절의 가장 빛나는 기억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