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집으로의 이사
[김신회의 매사 심각할 필요는 없지]
새집을 버리고 헌 집을 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작년 여름, 집에 누수가 일어났다. 신축 공동주택이었음에도 어느 날 갑자기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처음 겪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여름이 지나갔고, 이후의 계절은 날카로운 누수의 추억을 글로 써 책으로 엮는 데 보냈다. 에세이 작가는 사적인 비극을 쥐어짜 공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올여름은 달랐다. 누수 문제를 해결하였고(야호), 누수를 겪은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오예). 아직 정리해야 할 짐 앞에서 눈을 감으며 ‘미래의 내가 한다’며 새집에 적응하고 있다.
그런데 새집이라고 쓰고 나니 좀 머쓱하다. 왜냐하면 이 집은 누가 봐도 헌 집이기 때문이다. 지은 지 25년이 된 공동주택인 데다, 준공 이후 단 한 번의 인테리어 공사도 하지 않은 집이다. 맨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세트장에 들어온 줄 알았다. 혹시 알고 있는가, 욕실을 가득 메운 옥색 타일을. 나무보다 더 나무 같은 비닐 장판을. 옆으로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나무 창문은 아 어쩌란 말이냐. 베란다 창문은 죄다 은색 알루미늄 새시로 마감되어 있었다.
분명 처음 온 집인데도 묘한 향수에 사로잡혔다. 초등학교 때 살던 아파트가 이랬던 것 같고, 막 할머니 생각도 나고…. 그러다 서늘한 직감이 왔다. 곧 여기에서 살게 되리라는 직감.
이사를 계획하고 집을 많이 보러 다녔다. 후보로 생각해 둔 곳은 지은 지 10년이 안 되는 아파트였다. 공동 현관 앞에 경비실이 있고, 지하 주차장은 넓고, 근처에 지하철역이랑 마트, 공원이 있고, 별도의 인테리어 시공을 하지 않고도 쾌적하게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싶었다. 그런 집은 많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집을 보러 갈 때마다 같은 말을 들었다. “개는 안 돼요.”
몇 년 전부터 나는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다. 만약 누군가 ‘길에서 개랑 함께 살래? 아님 개 없이 집에서 살래?’라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전자를 택할 것이다. 흔히 반려견을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개는 가족 이상이다. 아기로 와 평생 아기로 머물다, 아기인 채로 세상을 떠나는 존재들. 깨알같이 욱하게 만들다가도 ‘널 왜 이제 만났을까!’ 하고 얼굴을 비비게 하는 사랑스러운 생명들. 개가 없던 시간이 거의 평생인데도, 그 시간을 모조리 기억나지 않게 만드는 마법 같은 금쪽이들.
하지만 ‘반려동물 금지’라는 계약 조항 앞에서 세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집은 얼마 없었다. 싱크대 문을 열려고 했을 뿐인데 문짝이 와르르 떨어지는, 장판은 안 찢어진 데를 찾는 게 더 빠른, 욕실엔 화려한 옥색 타일만이 나를 감싸는 집만이 우리를 받아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집에도 두 가지 장점은 있었다. 개가 수시로 바깥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베란다가 있었고, 동네에는 어느 때고 산책할 수 있는 공원들과 드넓은 풀밭이 있었다. ‘여기로 정해야 할까?’
계약에 앞서 물었다. “개 키워도 되나요?” 매도인 쪽 공인중개사가 대답했다. “안 될 리가 있겠어요. 이런 집이.” 이런 집이…. 내 집이 아닌데도 조금 울컥했지만, 신속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결국 나는 새 집을 버리고 헌 집을 얻었다. 아무리 버려도 버릴 것이 나오는 짐을 어떻게든 욱여넣고, 망가진 전등을 다시 달고, 벽지를 새로 발랐다. 찢어진 장판 위에는 개를 위한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고, 문이 떨어진 싱크대는 새 경첩을 달았다. 하지만 며칠을 쓸고 닦으며 애써봐도 헌 집은 결코 새 집이 되지 않았다. 잠을 쪼개가며 용쓰는 나를 보고 집이 팔짱을 낀 채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소용없다니까. 잠이나 자.”
겸허한 마음으로 잠이나 자기로 했다. 누수 해결에 이어 이사와 책을 준비하느라 2년 연속 휴가도 못 간 나에게 빈둥거릴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 결과 방구석에 누워 여름을 보냈고, 똑같은 자세로 가을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보게 되었다.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오전 내내 보슬비가 내린 어느 날, 베란다로 나가보니 바닥에 물기가 흥건했다. 낡은 새시와 타일이 비를 막아주지 못했는지 베란다 바닥이 물바다가 돼 있었다. 누수를 피해 이사 온 집에서도 누수가 일어나다니. 나에게 누수는 영혼의 단짝쯤 되는 걸까. 아니, ‘반려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이미 누수로 책 한 권을 쓴 자로서 이 정도는 가뿐히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훗. 이런 게 경력직의 여유라는 걸까. 일단 물을 닦았다. 쪼그려 앉아 걸레질에 매진하다 보니 알루미늄 새시 밖으로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그 풍경에 황홀해져 걸레를 내려놓았다. 일단 산책하러 가자. 모든 뒤처리는 미래의 내가 한다. 벌떡 일어나 비장하게 산책 줄을 채우는 내 모습에 개는 반갑다는 듯, 세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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