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숫가루가 M.S.G.R? 암호 같은 영어 표기

김아진 기자 2023. 9.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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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세계는 한글을 배우는데
국내는 황당한 영어 메뉴
서울 영등포 한 카페의 영어 메뉴판. 이 중 M.S.G.R은 미숫가루를 뜻하면서 논란이 됐다. 최근 다녀간 한 네티즌은 “M.S.G.R이 뭔지 몰라 물었더니 미숫가루라고 해서 빵 터졌다”며 “구태여 영어로 쓸 필요가 있을까”라고 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아후, 모르겠고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서울 용산 한 카페에 들어선 60대는 “뭘 먹겠냐”는 딸의 물음에 쓱 한번 메뉴판을 봤다가 1초도 망설임 없이 읽기를 포기했다. 죄다 영어로 써 있는 데다 필기체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다.

그는 “키오스크에 꼬부랑 글씨까지 점점 더 노인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MZ를 타깃으로 한 카페나 음식점에선 한글 설명이 없는 영어 메뉴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2030조차도 “K컬처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요즘, 영어가 전혀 힙하지도 않다”며 “이상한 조합의 영어는 촌스럽고 우습기까지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무슨 암호도 아니고

고급 레스토랑을 내세우는 식당들은 영어로 돼 있는 메뉴판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글이 함께 표시돼 있기도 하지만 가끔 “대체 이건 무슨 뜻이지?” 의문을 갖게 하는 곳도 있다. 코스 요리만 파는 청담동 한 레스토랑은 점심, 저녁 10만원대 식사 메뉴를 영어로 적어놨는데, 그중 메인 메뉴는 ‘Hanwoo wellington’이다. 한우를 이용한 요리라는 것은 알겠지만 이곳을 다녀온 30대는 “비프란 표현을 쓴다거나 안심, 등심을 영어로 쓰는 건 봤는데 좀 웃겼다”며 “한우 부심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러면 한글을 썼으면 어땠을까”라고 했다.

지난해에는 한 카페가 메뉴판에 적은 ‘M.S.G.R 7.0′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가게는 메뉴판을 영어로 쓰면서 미숫가루를 ‘M.S.G.R’로 적었다. 7.0은 7000원이란 뜻이다. “해도 너무 한다” “꼴불견”이란 비판이 쏟아졌지만 이 카페는 이런 뜻밖의 관심에 힘입어(?) 수도권에 10호점을 넘게 냈다. 지금도 미숫가루는 M.S.G.R로 표기돼 있고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로 꼽힌다. 최근 이 카페를 엄마와 다녀왔다는 네티즌은 “세종대왕께 엉덩이 맞고 흥선대원군께 꿀밤을 맞을 듯한 작명”이라고 꼬집으며 영어로 쓰고 싶었다면 ‘Misutgaru’ 또는 ‘Powder of roast grain’으로 쓰라고 했다. 또 다른 30대도 “웃기려고 저렇게 적은 거였다면 오히려 좋겠다”고 씁쓸해했다.

서울 연남동 한 카페 역시 영어로 음료 이름을 적어놨는데, 기존 메뉴에 ‘Plum cream latte’가 있고, 계절 메뉴에 ‘Jadu cream latte’라고 썼다. 자두를 보통 영어로 Plum(플럼)으로 표기하는데 혼용한 것이다. 게다가 영어 메뉴판 맨 밑에는 한글로 ‘1인 1음료 주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곳 후기를 남긴 네티즌은 “우리 엄마·아빠는 여기 오면 주문 못할 것 같다”며 “그런데 1인 1음료는 또 기가 막히게 한글로 적어놨네”라고 꼬집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다 같이 가서 영어로 주문하고 답 못 하면 비웃어주자” “한글 간판이 더 멋있는 시대가 온 걸 아직도 모르냐” “개그 소재다” 등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현행법으로 못 막아

가게 간판을 외국어로만 표기하는 것은 옥외 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에 따라 불법이다.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건물의 4층 이하 가게엔 해당되지 않는다. 또 외국어 메뉴판도 불법은 아니다. 그래서 지난 7월 국회가 10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음식점 등 공중접객업을 운영하는 자에게 메뉴판을 한글로 작성하거나 한글 병기를 권장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최근 서울시와 영등포구가 여의도를 ‘글로벌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며 관광 안내판에 한·영 병기 체계를 영어 먼저 쓰는 식으로 변경한 것을 두고도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좋은 시도”라는 의견도 있지만 “영어도 콩글리시에 비문에다가 외국인이 들으면 웃음 터지는 엉터리 영어가 한가득” “육회(Six Times), 곰탕(Bear Soup) 같은 황당한 일은 안 벌어져야 한다”는 쪽도 많았다.

일각에선 한글로 표현된 영어도 문제 삼는다. 한 작가는 블로그에 전북도가 추진 중인 ‘소셜 임팩트 퓨처레이팅 참여 기업 모집, ACCELERATING 사업’ 현수막 사진을 올려놓고 혀를 찼다. “저걸 누가 정확히 이해해서 신청하겠냐. 외국에선 오히려 한국어 배우기 붐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들은 ‘어륀지’가 아닌 ‘오렌지’로 발음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유치한 장난은 이제 그만하고 단정하게 한글로 또박또박 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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