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가짜 세계서 꿈꾸는 건 아닐까... 6년만의 하루키 장편 신작

장석주 시인·‘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 저자 2023. 9.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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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전 발표한 동명 중편 개작

6년 만의 장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돌아온 무라카미 하루키(74) 열풍이 심상치 않다. 일본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에 이어, 국내에서도 예약 판매만으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신작은 그가 43년 전 발표한 동명 중편을 개작한 것. Books는 하루키 애호가면서,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의 저자 장석주 시인의 리뷰를 싣는다. 하루키라는 벽을 넘어,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768쪽 | 1만9500원

땀 흘리며 달린 뒤 발코니에서 방울토마토를 곁들인 야채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어 먹는 듯한 상쾌한 기분!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을 때 그랬다. 당신이 고원에 선 주목나무같이 외롭다면, 살아갈수록 삶이 피곤하고 불안하다면, 그래서 가끔 기분을 좋게 만드는 소설을 찾는다면 하루키를 추천한다. 하루키는 페이지 터너다. 700쪽 소설조차 단숨에 읽힌다. 밝은 정조의 문장은 활어처럼 팔딱이고, 잘 가공한 이야기는 페이소스를 실은 채 흘러간다.

여기 아침에 문이 열리고 해가 지면 문이 닫히는 도시가 있다. 겨울에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이마에 외뿔이 돋은 아름다운 짐승들이 죽어나가고, 문지기가 짐승 사체에 유채 기름을 뿌려 태우는 도시이다. ‘하루키 월드’의 지리책에 새로 등재된 이 모호하고 낯선 도시는 놀이공원 같은 ‘무장소(placeless)’이자 상상으로 빚은 몽중 도시일 테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은 고교생 에세이 대회 입상자로 만난 소년과 소녀가 여기와 저 너머를 오가는 모험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모험은 욕망과 의지가 작동하는 세계인 이쪽과 비밀을 품은 저쪽 도시 사이에 걸쳐져 있다. 벽은 도시를 감싸고, 벽에는 문과 문지기가 있다. 벽은 수시로 형태를 바꾼다. 이건 벽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증거이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206쪽)

벽은 분리와 배제를 표상하고, 문은 이곳에서 저곳에로 건너가는 입사 의식을 암시한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이건 ‘성(城)’의 이미지이다!)와 문과 문지기는 카프카의 이미지다. 이걸 빌려 쓴 것은 하루키의 카프카 오마주일까? 도시의 광장에는 바늘 없는 시계탑이 있다. 시간이 멈췄거나 시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도시에는 강물이 흐르고 깊이 모를 웅덩이(이는 하루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우물’의 변주이다!)가 있는데, 그 심연에는 바깥 세계로 나아가는 ‘암흑 수로’가 있다.

하루키의 상상 세계에서 세계는 양분된다. 음과 양, 찰나와 영겁, 지상과 지하, 피안과 차안으로 세계가 양분되었다는 상상은 하루키의 무의식에 각인된 원형 심상일지도 모른다. 두 세계는 알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된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 있다.”(263쪽) 세계는 양분된 채로 존재한다! 산간 마을의 도서관과 저 너머의 신비한 도서관이 그렇듯이 두 개의 세계는 상호 대칭을 이룬다.

구애를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거나 평생 독신으로 사는 이들이 어우러진 실재의 세계 어딘가에는 도서관이 있고, 그곳에는 유령으로 떠도는 전임 도서관장과 상급 학교 진학도 거부한 채 책들을 남독(濫讀)하는 서번트 증후군 소년이 존재한다. 불가역적인 벽 저 너머 어딘가의 도서관에는 유령 소녀와 꿈을 해독하는 ‘나’가 있다. 어느 한쪽은 가짜이고, 그곳에는 ‘나’의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와 분리된 대역이 살아간다.

벽, 일각수, 우물(혹은 미지의 심연!), 양분된 세계, 외톨이, 아버지 부재,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 여성 실종의 미스터리를 풀어가기 따위의 오브제와 사건들은 ‘하루키 월드’에서는 낯설지 않다. 신작에서 ‘양을 좇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Q84′ ‘기사단장 죽이기’ 같은 전작의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독자도 있으리라. 낱개의 이야기를 퍼즐 맞추기 하듯 읽고 나니, 이건 벽에 둘러싸인 세계에서의 꿈을 읽는 판타지라는 생각이 더 짙어진다. “이 도시는 가짜 이야기로 가득할지도 모르고, 그 구성은 모순투성이”고, “‘나’와 ‘너’ 둘이서 여름 한철을 들여 만든 상상 혹 가상의 도시”(151쪽)이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696쪽)

지금 우리는 모순투성이인 가상 세계에 머무는 그림자가 아닌가, 우리는 가상 세계에서 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잇따른다. 노장 철학에서 보자면, 삶은 현실 속의 그림자이고, 그림자 속의 현실이다. 우리는 두 세계에 걸쳐진 존재이다. 환(幻)과 실재, 혹은 그림자와 현실이 조용히 삼투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산다. 둘 중 어느 쪽이 실재이고, 어느 쪽이 환의 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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