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나의 여름 휴가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여름휴가철도 지나갔습니다. 지인들이 저를 만나면 인사로 “어디 좋은 곳에 휴가라도 잘 다녀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날마다 휴가나 마찬가지인데 따로 휴가 갈 필요가 있나요” 하고 웃으며 대답합니다. 장난기 섞인 대답이지만 사실입니다. 휴가 명목으로 해외나 국내 명승지를 찾아 떠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나이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일을 겸해 하루이틀 가볍게 국내 여행을 하는 것이 휴가 못지않게 즐겁습니다. 잠깐의 일 자체가 보람 있는 일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남대학교에서 열리는 ‘삼성 드림 클래스 여름 캠프’ 개막식 참석을 하루 앞두고 순천 송광사에 갔습니다. 젊은 시절 가끔 찾던 곳이지만 마지막 갔던 때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번에는 송광사가 7000여 개의 경판(經板)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송광사 성보박물관장님의 경판 등 소장 유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또 법정 스님이 수행한 불일암도 둘러볼 요량으로 송광사를 찾았습니다. 경판은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유명하지만, 송광사 소장 경판도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 국가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송광사 경판은 조선 초기 사찰과 민간이 힘을 합쳐 만든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방장 스님을 뵙고 담소를 나누었는데,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환기 특별전’과 관련하여 김환기 화백의 예술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평가를 들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다시 찾은 송광사, 옛 추억이 되살아나서 좋았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국립광주박물관이었습니다. 송광사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광주로 가는 게 편리한 지름길이지만, 저는 운전기사분에게 고속도로 대신 화순을 거쳐 광주로 가자고 부탁하였습니다. 7월에 내린 비로 물이 가득 찼을 주암호수와 또 붉은 꽃이 만개했을 배롱나무 가로수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송광사 여행이 정해졌을 때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주암호와 배롱나무 가로수였습니다. 배롱나무는 여름 내내 100일 정도 꽃을 피웁니다. 주로 정자나 선비들의 정원에 심었지만, 지금 전남 지방에서는 가로수로 심기도 합니다. 어릴 적 제 고향 마을에 있는 정자 요월정(邀月亭)에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에 대한 추억 때문에 여름날이면 배롱나무가 보고 싶습니다.
광주에서 다음 날 일정은 오후에 있었으므로 오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찾아 전시를 관람하였습니다. 함께 간 일행 중 한 분이 소쇄원(瀟灑園)에 아직 가보지 않았다 하여 시간을 쪼개어 그곳을 방문하였습니다. 나머지 일행은 이미 방문했지만, 소쇄원은 몇 번이고 다시 가도 좋은 곳이라며 모두 함께 갔습니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옛날 단어라지만 이만큼 많은 획수를 가진 글자는 없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비가 그친 뒤 떠오르는 달을 감상하다는 뜻을 가진 제월당(霽月堂) 툇마루에 앉아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비 그친 후 떠오르는 달을 상상해보다가 다음 일정 때문에 표표히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오후에는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드림 클래스’ 사업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거나 지역적으로 외진 곳에 사는 중학생들과 장학생으로 선발된 대학생을 멘티와 멘토로 연결하여, 학습을 도와주고 진로 지도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평소에는 주로 온라인으로 진행하지만, 방학 때는 3박 4일 동안 함께 기숙하며 다양한 공부를 합니다. 아이들은 가정을 떠나 친구들을 사귀고 대학생들로부터 지도를 받고, 대학생들은 아이들을 지도함으로써 봉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캠프가 끝나고 헤어질 때면 서로 껴안고 작별을 아쉬워하며 울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짧은 격려사에서, 중학생 여러분은 부모를 떠나 생활해보는 드문 기회일 텐데,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은 물론 대학생 형들에게 궁금한 것은 주저함이 없이 질문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일 후, 캠프가 끝날 때는 여러분의 키가 훨씬 커져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일은 쪼끔 하고서 송광사, 화순 배롱나무 가로수, 담양 소쇄원의 운치를 즐기고, 국립광주박물관과 아시아문화전당을 관람하고 이에 더하여 남도 음식을 즐겼으니, 이만하면 남부럽지 않을 여름휴가라 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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