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문제 때문에… 대통령 고개 숙이고 학부모 소송까지
이례적으로 외신도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보도했다. 6월 21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한국의 대입 시험은 매우 어려운 문제들로 악명이 높고 대통령이 불만을 토로했다”며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사퇴,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 경질 등을 다뤘다. 열흘 뒤에는 미국 CNN이 “킬러 문항은 학생들로 하여금 두통을 유발하게 하는 고급 미적분학부터 매우 모호한 문학 지문까지 다양하다”며 “2022년 한국인들은 사교육에 총 200억 달러(약 26조2000억 원)를 지출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는 아이티(210억 달러), 아이슬란드(250억 달러) 등 작은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라고 했다.》
6일 전국에서 치러진 9월 모의평가(9모)는 앞서 전개된 사태들의 ‘분기점’이었다. 정부는 전에 없던 점검위원회, 자문위원회까지 만들어 문항을 점검했다. 9모가 끝난 뒤 입시업체들은 대체로 “대통령의 지시대로 킬러 문항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쉽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놨다.
● 대학 지식 묻는 문항까지… 오류 시비도
하지만 수능은 한국에서 여전히 가장 객관적인 대입 평가 수단이었다. 특히 최상위권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줄 세우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출제위원들은 ‘더 어려운, 더 복잡한’ 문제를 찾았고 각종 논문, 고전 철학, 경제금융 분야 전문 지식 서적, 대학 과정의 수학 이론까지 수능에 동원했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킬러 문항’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킬러 문항은 주로 수능이나 모의평가 국어, 수학 영역에서 출제됐다. 2019학년도 국어에는 만유인력 지식이 있어야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왔다. 2020학년도 국어에는 자기자본비율(BIS), 위험 가중 자산, 바젤 협약 등 전문 용어가 지문에 등장했다. 2022학년도에는 헤겔의 변증법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수학은 2018학년도에 복잡한 미분 문제가 출제됐는데 정답률이 2%대였다.
문제가 어렵고 꼬인 형태로 출제되다 보니, 출제 오류 시비도 있었다. 2021년 수능 때는 생명과학 문제에 오류 시비가 일었고 당시 수험생 92명이 평가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여기에 미국 명문대 교수까지 등판했다. 소를 제기한 학생들이 미국 대학 생물학 전공 교수들에게 e메일을 보내 이 문제가 틀리게 출제됐는지 물었고 유전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 석좌교수가 트위터에 “문제에 수학적 모순이 있다”고 밝혔다. 결국 강대중 당시 평가원장은 사퇴하고 전원 정답 처리됐다.
대표적인 ‘불수능’(어려운 수능)으로 꼽혔던 2002학년도 당시에는 수능이 전년도보다 심각할 정도로 어려워져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쉽게 출제한다는 정부 약속을 믿었다가 충격을 받은 학부모와 학생들을 생각할 때 매우 유감스럽다”며 사과까지 했다.
● 대통령 말에 ‘발칵’… ‘카르텔’ 조사로 이어져
이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6월부터 시작된 ‘킬러 문항’ 사태는 준비 없이 급박하게 벌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능을 불과 155일을 앞둔 6월 15일 윤 대통령은 “변별력은 갖추되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고, 학교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을 출제에서 배제하라”고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당일 대통령실이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를 출제하면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것 아닌가”로 발언을 수정한다고 밝혔다.
‘물수능’(너무 쉬운 수능) 우려가 일자 16일 대통령실은 “쉬운 수능, 어려운 수능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공정한 변별력은 모든 시험의 본질”이라고 대통령 발언을 수정하는 자료를 다시 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장상윤 교육부 차관이 “공정한 수능에 대한 지시였다”고 말했다. ‘학교 수업’에서 ‘공교육’으로, 다시 ‘공정한 변별력’으로, 또 ‘공정한 수능’으로 미묘하게 조금씩 바뀐 것이다.
사태는 인사로 번졌다. 6월 16일에는 입시를 담당하는 이윤홍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이 대기발령 조치됐다. 같은 달 19일에는 이규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임기 도중에 사임했다. 수능도 아니고 모의평가 때문에 교육부 국장, 평가원장이 물러난 적은 처음이었다. 다음은 학원가였다. 윤 대통령이 교육 당국과 사교육 업체를 겨냥해 “한편(카르텔)이란 말인가”라고 한 여파였다. 서울 강남구 일대 주요 학원들, 유명 ‘일타 강사’들이 세무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한 사교육 관계자는 “학원들은 거의 공안 정국 분위기다. 다들 숨죽이고 있다”며 “암암리에 수능이나 모평 관련 분석 자료를 내지 말라는 압박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전에 범인부터 색출하고 나섰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킬러 문항이 문제라면 이런 형태의 문항이 왜 수능에 등장하게 됐는지를 먼저 고민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 고교 교사는 “학습 범위 축소, 장기간 이어진 수능 문제 고갈, 의대 등 일부 인기 학과의 치솟는 커트라인(합격선)과 학생 쏠림 현상, 수능 외에는 다른 객관적 평가 지표가 부족한 현실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가 킬러 문항”이라며 “정부가 이런 포인트를 먼저 찬찬히 짚어봤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사람부터 자르고 봤다”고 지적했다.
● 韓 교육열 과열… 전설적인 ‘무즙 파동’도
1964년 경기중 입시 “엿 먹어봐라” 집단 항의 동아일보 1964년 12월 22일자 지면. 경기중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수험생의 학부모들이 솥에 무즙으로 만든 엿을 담아서 서울시 교육위원회를 항의 방문했다. 당시 이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으면 떨어진 아이들을 구제해주겠다고 교육감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엿을 만들어 왔다. 엿 먹어 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DB |
한국의 과열된 교육 현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종종 거론되는 것이 1964년(1965학년도) 경기중 입학시험 출제 오류 사태였다. 당시 경기중 입학은 경기고-서울대 진학 지름길로 꼽혔고 전국 수재들이 몰렸다. 입학시험 자연 과목 18번에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으나 문제는 다른 보기에 ‘무즙’이 있었던 것. 일부 학생들은 무즙을 정답으로 선택했다가 틀렸다. 어릴 때 무즙으로 엿기름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학부모들은 “무즙도 정답이다”며 항의 집회를 시작했고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서울시교육감이었던 김원규 씨가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다면 무즙을 답으로 쓴 학생들을 구제해보겠다”는 발언을 했고, 일부 학부모들이 실제로 솥에 무즙으로 엿기름을 만들어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가지고 나와 시의원들에게 “엿 먹어보라”며 항의 시위를 했다. 결국 반년이 흘러 경기중은 ‘무즙’을 정답으로 선택한 학생들 중 일부의 전학을 받았다. 당시 한상봉 문화체육교육부 차관, 시교육감 등이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는 1969년 중학교 입시 폐지의 단초가 됐다.
● 교육계 “경쟁 구조에 대한 고민 필요”
문제는 앞으로다. 킬러 문항이 배제된 9월 모의평가는 ‘변별력’ 측면에서 일부 불안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수학 과목이 ‘쉬웠다’는 평가가 나온 것. 6일 시험을 마치고 나온 고교생들 중 상위권 상당수에서는 “이럴 거면 수학을 왜 공부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수능이 변별력을 상실한다면 대학 입장에서 정시에 지원한 학생들을 변별, 즉 ‘줄 세우기’ 할 수 있는 다른 자료들은 뻔하다. 수학이나 특정 과목에 가중치를 높인다든지, 논술 혹은 면접에서 보다 더 어려운 문제, 어려운 질문들은 던진다든지 하는 방법뿐이다.
교육계에서는 킬러 문항 논란을 계기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한 고교 교사는 “상대평가와 경쟁 체제의 현재 입시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킬러 문항과 유사한 논란은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우리나라는 교육부가 각 대학에 일정 비율 이상의 신입생을 반드시 정시(수능 성적)로 선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수도권 주요 대학은 약 40%를 정시로 선발한다.
수능 성적 100%로 선발하는 정시의 구조상 주요대 의대, 약대, 수의대, 한의대, 치대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최상위권 대학들로 올라가면 한 문제 차이가 당락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대학들은 이런 기능을 수능이 해주길 원하고 출제위원들이 이를 위해 고안한 것이 킬러 문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일부 대학에서는 이 같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신입생을 뽑을 때 아예 과, 학부 칸막이 없이 ‘1학년’으로만 뽑는다거나 인문계 혹은 자연계로만 뽑는 식이다. 이렇게 학생을 뽑으면 굳이 1등부터 100등까지 가려낼 필요가 없다. 일단 이렇게 선발한 뒤 1학년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학생들이 2학년이나 3학년 때 좋은 과로 진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 사립대 교수는 “그간 일명 명문대라고 하는 곳들은 학생을 잘 가르치려는 노력 없이 처음부터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데에만 집중해왔다. 그 결과 대학 교육의 질이 떨어진 측면도 있다”며 “잘하는 학생을 뽑는 것보다는, 일단 뽑아서 우수한 인재를 만드는 방향으로 변해야 대학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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