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쪽 난 화물선 독자 기술로 수리…“조선업 발전 토대 됐다”

2023. 9. 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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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③ 박정희와의 첫 만남
1967년 대한조선공사 영도조선소를 시찰하고 있는 신동식 경제수석, 박종규 경호실장, 박정희 대통령 (사진 왼쪽부터, 직함은 당시 기준). [사진 신동식], [중앙포토]
1961년 11월 11일 도쿄. 로이드선급이 일본에 파견한 검사관으로 일하던 신동식 회장은 주일 대표부(현재 대사관) 직원의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저녁에 열리는 리셉션에 꼭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길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에 온 것이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때 신 회장은 은밀하게 응접실로 안내됐다. 별이 번쩍번쩍 달린 군복을 입은 ‘혁명 실세’들이 가득했다. 얼떨떨한 신 회장에게 박 의장이 대뜸 악수를 청했다. 손이 저릿저릿했다.

대뜸 군인 한 명이 반말로 소리쳤다. “당신이 신동식이야? 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영화를 많이 누렸으니 이제 조국에 와서 애국해야지.” 울컥했다. 칵테일 몇잔 마신 취기에 스웨덴으로 출국하는 과정에서 여권을 받지 못해 발을 굴렀던 설움이 북받쳤다. “총 들고 휴전선 지키는 것만 애국입니까? 정작 국내에서 발버둥 칠 때나 외국에서 밤잠 못자고 고생할 때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애국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싸한 분위기에 “어이쿠, 실수했구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박 의장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는 “초면인데 대뜸 명령부터 해대서 미안합니다”라며 신 회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큰소리를 친 사람은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었다. 이외에도 박태준 최고회의 상공분과 위원장, 이영진 조선공사 사장 등이 모여있었다. 몇몇은 박 의장과 함께 다음날 미국으로 떠나고, 또 몇몇은 차관과 기술이전 교섭을 위해 서독으로 갈 예정이었다. 신 회장은 “의욕과 정열만 가지고 기술을 달라, 돈을 달라 한다고 덥석 내주겠느냐”며 서독 방문을 연기하고 일본의 산업 기반을 둘러볼 것을 권했다. 조선과 철강 등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막 도약을 준비하는 모습이 우리의 롤 모델이 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박 의장은 서독 일정을 늦추고 일본 산업현장을 둘러보라고 지시한 뒤 이튿날 미국으로 출발했다.

박 의장, 케네디 초청 방미 길에 일본 들러

1962년 수리를 마친 대포리호. [사진 신동식], [중앙포토]
신 회장은 도쿄의 이시카와지마하리마, 요코하마의 NKK, 고베의 히타치 등의 조선소를 비롯해 2주간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남쪽의 규슈까지 주요 조선소와 제철소, 공작기계 공장을 방문하는 일정을 급히 마련했다. 배를 만들 때 필요한 자재에서 건조 과정까지 감독하는 로이드 검사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서독 차관단을 만나기로 한 호텔 앞에 검은색 세단이 주르륵 도열했어요. 그걸 보더니 ‘영 사기꾼은 아닌가보다’는 눈빛으로 보더군. 처음에 홋카이도에 갔을 때는 ‘신 군, 담배 좀 사와’라고 하던 양반들이 도쿄쯤 내려오니까 ‘신 상, 오늘은 어디로 가지요’라고 하더니, 규슈까지 내려가서는 ‘신 선생, 이번엔 뭘 중점적으로 보면 됩니까’ 그래요. 공장 건물만 대충 보여주는게 아니라 내부까지 상세히 보여주고, 깍듯이 대하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거지. 며칠 겪어보니 이들도 단순무식한 군인들이 아니더라고. 겉으로는 거칠고 투박했지만, 진심으로 나라 발전을 고민하는 열정을 품고 있었어요. 몸은 고됐지만, 나중에는 친형제 이상 가까워졌지.”

사실 60년대에는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엘리트였다. 특히 고급장교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국 국방대학원(War College)에서 전문 리더십과 경영을 배웠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효율적으로 대서양과 태평양 건너 유럽과 아시아로 보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군대 특유의 ‘계획하고, 실천하고, 평가하라(Plan, Do, See)’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것이 하버드를 비롯한 명문대로 전파되면서 오늘날의 MBA 코스로 발전했다. 신 회장은 “이런 교육을 받은 혁명 세력은 의사 결정 과정이 나름 합리적이었고, 군대 특유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통해 선진국을 빠르게 추격할 수 있었다”며 “물론 지금 보기에는 다양성이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이들의 열정과 추진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 회장을 박 의장에게 추천한 사람이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초대 경제기획원장을 맡은 김유택 부총리였다. 주영대사 시절 런던의 ‘10실링 클럽’에서 만난 패기 넘치는 젊은이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구체적인 중화학공업 발전 계획을 세우고 현실을 옮기기 위해 국내외에서 발로 뛸 적임자로 낙점한 셈이다. 일본 산업현장을 돌아보던 교섭단도 박 의장에게 “꼭 필요한 인재”라고 보고했다. 김 부총리는 여러차례 전화를 걸어 “귀국해 나라에 힘이 돼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서독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던 교섭단도 “함께 하자”며 옷깃을 당겼다. 결국 신 회장은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 도착 후 집에도 못 가고 영도조선소로

19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맨 왼쪽)이 존 F 케네디 대통령(맨 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사진 신동식], [중앙포토]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 선으로 아프리카의 가봉에도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다. 미국(3000달러)이나 일본(500달러)은 언감생심, 필리핀(250달러)도 박 의장이 “그만큼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롤모델’로 삼을만큼 격차가 컸다. 조선 산업의 바탕인 기계나 철강은 고사하고, 볼트·너트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박 의장을 만난 동갑의 케네디 대통령이 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을 위해 요청한 23억달러의 차관을 “환상적(fantastic)인 계획”이라며 거절할 정도였다. 엄청나게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한 셈이다.

김포공항에 내리니 헌병과 지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길로 최고회의 건물로 향했다. 박 의장은 “반갑고 고맙다”며 “당장 조선공사로 내려가 살펴보고 어찌하면 좋을지 알려달라”며 대한조선공사 고문으로 임명했다. 몇년만의 귀국이었지만 본가에도 들리지 못하고 부산 영도로 출발했다. 조국에 돌아왔다는 설렘이 가시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조선소지만 잡초가 무성한 폐허였다. 국영인데도 7개월째 월급을 주지 못해 몇몇 기술자들이 여기저기 널린 고철과 안 쓰는 기계를 국제시장에 팔아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조선 전문가가 처음 한 일은 낫을 들고 풀을 베는 것이었다.

미국의 원조로 들여온 전기로에 전기를 끌어오고, 일본에서 변전 설비를 들여와 겨우 조선소의 구색을 갖추는 것으로 62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선박 수요가 없어 학교용 주물 조개탄 난로와 가정에서 많이 찾던 재봉틀 머리를 만들었다. 겨우 밀린 월급을 주는 수준이었지만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에 직원들에게 생기가 돌았다. 내친김에 한국전쟁 중 동해안에 좌초해 두 동강 난 4000t급 화물선 대포리호 수리에 도전했다. 신 회장은 “일본에 의뢰해 건져서 수리하자는 의견이 나오길래 최고회의에서 ‘이런 기회를 외국에 넘겨줘서는 독자 기술과 고급 인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주장해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수리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미국선급협회(ABS)에 등록된 선박이라 수리 과정과 결과에 대해 국제 기준에 맞춰야 했다. 주먹구구식으로 땜질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전기용접이라는 신공법을 적용하기 위해 새로 용접기를 도입하고 기술을 익혀가며 수리를 진행했다. 불행한 인명사고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국에서 모인 기술자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 박 의장은 송요찬 내각 수반, 김유택 경제기획원장 등을 대동하고 진수식에 참석해 “혁명의 성과”라고 치하했다. 조선공사는 이후 3500t급 신양호·동양호를 건조하며 궤도에 안착했다. 신 회장은 “대포리호 수리를 통해 확보한 인력과 기술이 우리나라 조선산업 발전의 토대가 됐다”며 “60년만에 이런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조선공사가 안정을 찾으면서 신 회장은 경제기획원장 고문(1급)으로 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힘을 보탰다. 이와 함께 맨손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이런 식이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원양어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이탈리아·프랑스 정부에 차관을 요청했다. 원양어선 200척을 만들어주면 고기를 잡아 갚는다는 것이다. 선원 확보를 위해 국제 훈련 센터를 만들어달라고 FAO에 제안했다. 식량 증진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FAO는 부산 영도에 국제 원양어업훈련센터를 세웠다. 남의 돈으로 배와 인력을 마련한 우리나라는 알래스카, 사모아, 라스팔마스, 시에라리온 등에 원양어업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 회장에게 ‘봉이 신선달’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하지만 이런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신 회장은 다시 한번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 새로운 지식을 배우자고 결심했다. 63년 도미해 ABS에서 첫 한국인 검사관으로 일했다. 2년 후 재회한 박 대통령의 설득으로 귀국을 결심할 때까지 뉴욕 생활이 이어졌다. 〈계속〉

「 한국전쟁의 폐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일어서기까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등공신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선입국 의지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만든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KOMAC) 회장도 그 반열에 들 인물이다. 신 회장에게는 ‘조선업의 아버지’란 수식어 외에도 국가건설기획자 (nation building architect) 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고, 과학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한국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을 인터뷰해 묻혔거나 잊힌 비화를 발굴하고 교훈을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92세인 지금까지 경영 일선을 지키며 새로운 기술과 미래 먹거리 창출에 도전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조선인 신동식 회장이 구술한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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