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세대 ‘이승만 문맹’으로 지낸 60년 반성, 묘역 참배했다
이승만-4·19세대 화해 이끈 이영일 전 의원
지난 3월 이 대통령 묘역 참배를 주도한 사람은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재학시절 4·19 학생 시위를 주도했던 이영일 전 국회의원(85)이다. 그는 “이승만이란 선지적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승만을 공부하면 할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면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공과 과를 함께 봐야 하는데 작은 과만 보고 헤아릴 수 없이 더 큰 공에 눈을 감아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참배는 ‘이승만 문맹(文盲)으로 지내온 60여년 세월에 대해 뒤늦게 반성문을 쓴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과거에만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보면서 탈각(脫殼) 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다른 굵직한 사건들도 언젠가는 역사적 화해를 이룰 날이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정선거·친일 경찰 등용은 잘못
Q : 4·19때 어떤 역할을 했나.
A : “63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학과별 대표 등 서울대 문리대 학생 지도부가 16일 모여 자유당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의기투합했다. 시위 현장에서 뿌릴 유인물 초고는 필력 좋기로 소문난 이수정(전 문공부 장관)에게 맡기기로 했는데, 봄방학때 고향에 간 그는 18일에야 올라와 합류했다. 그런데 하숙방에 잠간 가더니 순식간에 선언문을 적어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명문이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란 표현이 들어간 4·19 선언문이다.”
Q : 이승만 하야를 외친 주역이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건 자기부정 아닌가.
A :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진 이승만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4·19 혁명의 정신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대학교 입학할 때까지 대통령은 이승만이라 비교할 대상도 없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독재자고 나쁜 사람이라고 폄하하고 살았을 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다 뒤늦게 이승만을 공부하게 됐는데 하나 하나 알게 될수록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단언컨대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못했다. 전 국민이 이런 사실을 똑바로 봐야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텐데, 다른 사람도 아닌 4·19 주역이 그런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난 3월 이승만 148주년 탄생일에 단체로 참배하자는 메시지를 4·19 세대 지인 100명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냈는데, 70명 넘게 찬동한다는 답이 왔고 실제로 50여명이 참배했다. 반대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Q : 뒤늦게 이승만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A : “2010년 4·19 50주년을 앞두고 박범진 전 의원으로부터 ‘4·19 세대가 본 이승만의 공과 과’란 제목으로 원고를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원고 수락은 했지만 제대로 아는 게 없어 3개월간 국회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제헌의회 속기록과 국무회의 기록 등 사료들을 훑었다. 공부는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고 지난해 ‘건국사 재인식’ 이란 제목으로 책을 내기도 했지만, ‘이승만 문맹’에서 탈출한 결정적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공과 과를 함께 쓰야 하는데 공이 너무 많아 균형을 맞추기 힘들었다. 굵직한 것만 꼽아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신생 대한민국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 6·25 침략을 막아낸 것, 탁월한 외교술로 한·미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것 등 지금 대한민국의 근간이 다 이승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흔히 간과되고 있는데 내가 이 못지 않게 높이 평가하는 건 농지개혁이다.”
Q : 농지개혁에 대해 좀 더 설명하면.
A : “이승만은 농업국가인 대한민국에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인 조봉암까지 농림장관에 기용했다. 해방 후 북한에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하기 어렵다. 사유재산권 침해의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게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이다. 지주들이 소유한 3정보 이상의 땅을 전부 국가에서 매입하고, 소작인이 자기 소출의 20%를 5년간 내면 땅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문제는 농지개혁법은 통과됐는데 지주들의 반발로 유진오 법제처장도 시행령 제정을 머뭇거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보다못한 이승만이 시행령 없이 시행을 밀어붙였다. 농민들에게 자기가 소유하게 될 수 있는 땅을 미리 열람하게 해서 서류상의 농지개혁을 먼저 했다. 그게 6·25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거나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6·25 때 농민들은 전부 공산주의 지지로 넘어갔을 것이다.”
Q : 공도 있지만 과도 적지 않은 분 아닌가.
A : “과를 지적하는 것 가운데 잘못된 프레임이 씌워져 있는 것을 걷어내고 봐야 한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프레임은 ‘민족분단의 원흉’이란 것인데 북한이 먼저 단독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한 것이지 이승만이 먼저 남쪽의 단독정부를 수립한 게 아니다. 오히려 얄타 비밀협정을 무력화시킴으로써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뻔 한 것을 막은 이승만의 혜안을 높이 봐야 한다.”
Q : 어떻게 얄타 비밀협정을 무산시켰나.
A : “38도선을 경계로 미·소가 분할점령했지만,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처칠과 스탈린, 그리고 당시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루즈벨트 사이에 소련이 극동 전선에 참전하는 대신 만주와 한반도를 차지하는데 대한 양해가 있었고,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미국은 여차하면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줄 지 모른다고 이승만은 내다 보았다. 이런 사실은 그가 미국 국무부에 인맥이 두터운 로버트 올리버와 소련 출신의 에밀 구베로를 비서로 두었기에 간파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가쓰라-테프트 밀약 때 한 번 미국에 뒤통수를 맞은 전례가 있어 늘 미국을 의심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달려가 미국 상하 양원 의원들에게 일일이 서한을 보내고 ‘미국이 한반도를 소련에 양보했다’고 터뜨림으로써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국제정세를 읽은 대단한 식견이자 외교술이다. 이런 사람에게 민족분열의 원흉이라 손가락질하는 건 무리가 있다.”
Q : 이승만이 독재를 한 건 맞지 않나.
A : “명백한 과도 있다. 3선 개헌을 밀어붙인 것, 후계자를 잘못 내세워 부정 선거를 저지른 것 등이다. 또 하나 조봉암 사법 살인도 과오다. 조봉암은 독립운동,항일운동을 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한때 공산당 계열이었지만 제헌의회에 참여해 대한민국 체제를 만든 사람 중 한 명이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친일 경찰을 등용한 것은 공산주의와의 싸움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민족정기란 점에서 보면 아쉽고 비판받을 일이다. 3선 개헌 후의 이승만이 독재를 한 건 맞다. 그러나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하야했다. 내가 비교정치학을 수십년 공부하고 해외 각국을 다 돌아다녔는데 독재자가 제 발로 물러난 사례가 없다. 내가 예전에 쓴 책의 제목이 ‘미워할 수 없는 우리들의 대통령’인데 딱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과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이 마오쩌둥에 대해 사후 평가를 하면서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 했는데, 우리는 왜 그리 못하나. 이승만의 공이 어찌 칠에 그치겠는가.”
농지개혁도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
Q : 이승만 양자 이인수 박사가 4·19 희생자 묘역에 참배한 것을 보며 감회가 남달랐을텐데.
A :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화해가 한 고비를 넘어가는 느낌이다. 4·19 주역들이 이승만을 재평가하니 당시의 희생자 유족들도 이인수 박사의 참배를 막지 않게 됐다. 역사적 화해 분위기가 일어나니 이승만 기념사업에 대해 꼬투리 잡을 명분도 서지 않게 됐다.”
Q : 지금 한국 정치의 주역 중에는 1980년대 학생운동 주축의 비중이 상당하다. 그들의 자세를 학생운동 1세대로서 어떻게 보나.
A : “학생 시절의 사고에 묶여 있다면 미래가 없다. 과거에 갇혀서 살면 안 된다. 나도 뒤늦게 공부를 하고 해외 견문을 넓히고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승만 재평가 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20대의 이영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4·19 때 한 일을 부정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아니다. 그때는 그 때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또 다른 할 일이 있다는 얘기다.”
Q : 5·18을 포함, 과거 역사적 사건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갈등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A : “4·19가 그랬듯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다만 저절로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사고에 묶이지 말고 껍질을 깨는 탈각의 노력을 해야 한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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