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엔튜닝] 재미는 어떻게 좌절감을 이길 수 있을까(MD칼럼)
[도도서가 = 북에디터 정선영] “이렇게 끈기 있는 사람이었어?”
최근 20년 지기 친구에게 들은 말이다. 그렇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기타를 벌써 10개월째 꾸준히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놀라워한다. 매번 레슨이 끝나기 무섭게 오늘은 또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하소연하면서 말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대체로 공부를 싫어한다. 배우고 익히는 게 안 되니 성적도 나쁘다. 공부에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없고 도통 재미를 붙이지 못한다. 공부를 소홀히 할수록 성적은 더 나빠진다. 악순환이다. 학창 시절 내게 수학이 그랬다. 못하니까 싫고, 싫어서 안 하니까 더 못하고, 그러다 영영 안녕하게 되는 수순.
그런데 마흔이 넘어 기타를 배우면서 정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다. 정말 이 정도로 못하면 기타가 싫어질 법도 한데, 싫지가 않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또 다른 친구는 내게 안부를 이렇게 묻는다. “괜찮아? 기타는 좀 어때? 그렇게 안 늘어서 어쩌니? 속상하겠다” “응, 속상해” “그래도 계속 하네?” “그래도 계속 해. 음…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겠지?” “그럼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지. 안 그러면 진작에 때려쳤지.”
그렇다, 재미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 내가 기타를 배운다고 밥이 나오지도 떡이 나오지도 않는다. 이 나이에 기타로 대학 갈 것도 아니다. 기타를 안 치면 큰일 나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누가 날 어디 가둬놓고 억지로 시키지도 않는다.
마흔이 넘어서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는 것, 그 자체가 재미있나 보다.
물론 기타 선생님의 타박(?)을 들을 때면, ‘아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 깨닫고 있다.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걸,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지난 레슨, 코드 4개만 주야장천 연습하는데도 오른손이고 왼손이고 여전히 부자연스러운 나를 보고 선생님은 답답해 했다. 그러다 본인이 손을 바꿔 기타를 쳐보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코드를 잡고 왼손으로 기타 줄을 튕긴 것.
“음…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알겠네요” 이어 덧붙였다. “제 왼손보다 스트로크가 좀 더 자연스러운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스트로크가 많이 좋아졌어요” 음, 이것은 칭찬인가?
하지만 레슨을 하면서 칭찬은 ‘말 그대로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일이다. 대개 나는 선생님의 실소를 자아낸다. “아, 웃지 마세요! 저 지금 진지하다고요!” 내가 수업 중 하는 단골 멘트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양손에 내가 짜증을 낸다. 당연히 성취감 따위를 논할 수준도 아니다. 그런데 꼭 성취감을 느껴야만 재미난 건 아닌가 보다.
인간에게 성취감이란 매우 중요하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에 따르면 성취감, 다시 말해 ‘인정의 욕구’는 상위 단계 욕구로, 생존을 위한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활성화된다. 욕구가 거듭 좌절되면 분노하고 절망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거듭된 절망과 닿지 않는 성취감에도 느끼는 재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음… 작디작은 눈곱만한 성취에도 만족하고 기뻐하는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매일 좌절하면서도 재미있다고 다시 기타를 잡는 나를 보면,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왜, 내 맘을 몰라주냐고!” 레슨 중 기타에게 종종 하는 혼잣말이다. 귀가 밝은 선생님이 말했다. “기타가 그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연습하세요.”
그래, 재미있어서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기타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 정선영 북에디터. 마흔이 넘은 어느 날 취미로 기타를 시작했다. 환갑에 버스킹을 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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