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과 푸틴이 만나면? 한·미·일, 북·중·러 갈등 커지고…
한·미·일 정상회의로 ‘위험은 줄고 기회는 늘었다’던 정부 주장 무색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것이란 미국발 보도가 나왔다. 북쪽이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러시아는 북쪽에 식량·에너지와 함께 정찰위성·핵잠수함 등 군사기술을 지원하리라는 제법 그럴듯한 추정까지 이어진다. 미국 쪽은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엄중 경고했지만, 북·러 모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부터 2023년 7월27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의 북한 전승절 기념행사 참석까지 이어진 과정을 곱씹어보면, 정상회담 성사 여부와 별개로 북·러가 이미 ‘밀착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하노이 회담 무산 직후 북쪽이 원한 것
북한에 러시아는, 중국과는 조금 다른 이웃이었다. 구갑우 북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중 관계는 상대국이 외세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자동 개입’하는 동맹이었지만, 북-러 관계는 러시아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핵우산’을 제공하기로 한 수준에 그쳤다”고 짚었다. 냉전 시절 북한은 때로 갈등했던 중국과 러시아(옛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추구했다.
냉전이 끝난 직후 중·러 모두 남쪽과 수교했다. 북은 미·일과 수교하지 못했다. 중·러의 명시적 반대에도 북은 ‘핵무장’의 길로 나아갔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은 1차 핵실험을 했다. 불과 닷새 뒤 중·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첫 대북제재 결의안(1718호)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중·러는 2017년 9월3일 북한의 6차 핵실험과 같은 해 11월29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와 함께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을 때도 안보리 결의 2375호와 2379호 통과를 막지 않았다. 중·러의 입장은 2018년 4월 남북 판문점 정상회담, 특히 같은 해 6월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성사된 뒤에야 눈에 띄게 달라졌다.
2019년 2월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다시 열렸다. 김 위원장은 기차편으로 중국을 거쳐 베트남으로 향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노동신문> 등 북쪽 매체는 당시 김 위원장이 ‘열흘 낮, 열흘 밤’ 동안 왕복 ‘2만여 리 대장정’을 벌였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같은 해 4월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전격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집권 이후 첫 정상회담에 나섰다.
“북한에는 자국 안보와 주권 유지를 위한 보장이 필요하다.” 당시 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이렇게 강조하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입에 올렸다. 그는 회담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6자회담을 곧바로 재개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상황까지 간다면 국제적 보장이 필요할 것”이라며 “미국이나 한국 쪽 보장만으로 충분하다면 좋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안전보장 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6자회담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미 하노이 회담 무산 직후 북쪽이 무엇을 원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을 의장국으로 한·미·일과 북·중·러가 참여해 2003년 8월 시작된 6자회담은 2007년 9월 6차 2단계 회의 이후 결렬됐다.
2019년 이후 4년 만에 만남 앞둔 북·러 정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 중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미국 및 동맹국 당국자들이 밝혔다. 회담에선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을 위해 러시아 쪽에 무기를 공급하는 문제를 비롯한 여타 군사협력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023년 9월4일치에서 “북한 수뇌부 경호요원을 포함한 북쪽 대표단 약 20명이 8월 말 기차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뒤 항공편으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열흘 정도 일정이었는데,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준비를 위한 출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정보 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보도 내용은 이례적으로 구체적이다. 미국 쪽이 ‘경고’를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에 유출했을 것이란 추정이 나오는 이유다.
신문은 “푸틴 대통령은 북한이 포탄과 대전차 미사일을 지원해주기 원하고, 북쪽에 정찰위성과 핵추진 잠수함 관련 첨단 기술을 전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며 “김 위원장은 러시아의 식량원조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두 정상은 9월10일부터 13일까지 동방경제포럼이 열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연방대학교에서 만날 것으로 보인다”며 “김 위원장은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33번 부두도 방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2019년 4월 방러 때도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루스키섬의 극동연방대학교 교내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머무른 바 있다.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북·러 사이에 적극적으로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확보한 정보를 모두 밝힐 순 없지만, 최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것도 본질적으로 무기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뉴욕타임스>의 첫 보도 이후 후속 보도가 쏟아지자,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9월5일 직접 브리핑에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어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관련 논의를 지속하기 원하고, 대면접촉을 포함한 정상 간 대화까지 염두에 둔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며 “러시아에 공급한 무기가 다른 주권국가의 식량 저장고와 도시 난방시설을 공격하는 데 쓰인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 국방장관의 방문 뒤 무기 점검 나선 김정은
설리번 보좌관이 언급한 쇼이구 국방장관의 평양 방문은 북쪽의 ‘전승절’(7·27 정전기념일) 70주년에 즈음해 이뤄졌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7월26일 김 위원장이 쇼이구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러시아 군사대표단을 접견했고, 쇼이구 장관이 김 위원장에게 푸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러시아 대표단 일행과 함께 북한 국방성 주최 ‘무장장비(무기) 전시회’도 둘러봤다. 통신은 김 위원장이 쇼이구 장관에게 최신 무기류를 소개했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이튿날인 7월27일 오전 쇼이구 장관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로 따로 불러 ‘상호 관심사’를 논의한 뒤 오찬을 함께했다. 통신은 두 사람이 “국방안전 분야에서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과 협조를 가일층 발전시키는 데서 나서는 일련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토의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저녁에 열린 러시아 대표단 환영연회에서 리병철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은 쇼이구 장관을 ‘가장 가까운 전우이며 형제’라고 부르며, “이번 방문이 공동의 이상과 목적표를 실현하는 한길에서 피로써 맺어지고 날로 굳건해지고 있는 두 나라 사이의 단결과 연대성의 위력을 힘있게 과시하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김 위원장의 이후 행보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종합하면, 김 위원장은 8월3일부터 5일까지 대구경 방사포탄 생산공장과 전략 순항미사일 및 무인공격기 발동기(엔진) 생산공장 등 중요 군수공장 현지지도에 나섰다. 김 위원장이 군수공장 현지지도에 나선 것은 2023년 들어 이때가 처음이다. 김 위원장은 8월11일과 12일에도 △전술 미사일 △전술 미사일 발사대 △전투 장갑차 △대구경 조종 방사포탄 생산공장을 두루 둘러봤다. 통신은 9월3일에도 구체적 일정은 밝히지 않은 채 김 위원장이 북·중 기계연합기업소와 중요 군수공장을 현지지도했다고 전했다. 쇼이구 장관의 방북 이후 한 달 새 군수공장 현지지도가 무려 세 차례나 집중된 것은 김 위원장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해야 할 이유’는 많고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북한은 무기를 수출할 수 없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 무기 수출을 엄히 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과 러시아의 무기 거래를 막을 실질적 방안이 없는 상태다. 설리번 보좌관은 ‘대가’를 경고했지만, 북·러 모두 이미 ‘더 이상 제재를 부과할 수 없는 수준’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다. 북·러 처지에서 ‘해야 할 이유’는 많고,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북한은 2022년 3월2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고 즉각적인 철군을 촉구하는 유엔총회 결의안(ES-11/1)에 반대한 5개국 중 하나다.
무기 거래는 북-러 연합훈련 등 군사협력 확대와 강화의 신호탄일 수 있다. 쇼이구 장관도 9월4일 <인테르팍스> 통신에 “북한은 우리의 이웃”이라며 연합훈련 관련 논의가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성사된다면, 이미 연합훈련을 실시 중인 중·러와 맞물려 북·중·러 삼각 군사협력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이쯤 되면 한·미·일-북·중·러 대립 구도가 고착화하고, 한반도가 그 최전선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찌 관리할 것인가?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로 ‘위험은 줄고, 기회는 늘었다’던 정부의 주장이 무색해진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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