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조대비가 복원한 왕정 체제 무시하다 7년 만에 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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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흥선대원군의 흥망
1882년 6월 10일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에 성공한 다음 날, 의정부는 대원군을 받드는 의절(儀節) 6가지를 왕에게 올렸다. 첫째가 대원군 앞에서 정1품 영의정은 ‘시생(侍生),’ 좌·우의정 이하 모든 대신은 ‘소인’이라 자신을 낮추어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시생은 ‘당신을 모시는 소생’이란 뜻이다. 이 건의는 이전에 이런 존대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안동 김씨 전횡 도구였던 비변사 축소
1863년 12월 고종이 임금이 됐을 때 흥선군은 42세였다. 1865년(고종 2년) 4월 13일 대왕대비는 수렴청정 중에 경복궁 중건을 결정하면서 공사 일체를 대원군에게 맡긴다고 했다. 그래서 대원군은 경복궁 영건도감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 궁궐 건축 관련 사업의 총책은 영의정이 되는 것이 상례로 대왕대비는 흥선군의 반열을 영의정 바로 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떻든 철렴(撤簾) 후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이란 전례 없는 토목공사로 국정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대원군의 권력은 대왕대비 조씨가 힘써 이룩한 의정부-육조 중심의 국정 운용체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대왕대비는 안동김씨 전횡의 도구였던 비변사를 의정부 안의 한 부서로 축소하여 묘당(廟堂)이라 부르게 했다. 국방에 관한 일 하나를 다루는 소위원회였다. 일본학자들이 『매천야록』 『한사경(韓史檠)』의 기록을 이용해 대원군의 국정 관여를 안동김씨와 마찬가지 세도정치로 규정했으나 정사인 『고종실록』의 기록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왕대비가 물러난 뒤 대원군은 의정부-육조 중심의 왕정 체제를 무시하다가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원칙론의 탄핵을 이기지 못했다.
1866년(고종 3) 9월 11일 프랑스 해군의 강화도 점령 대책과 관련하여 대원군은 ‘묘당’ 앞으로 대책 몇 가지를 보냈다. 대원군의 정사 처분에 관한 『고종실록』의 첫 기록이다. ‘서양 오랑캐’ 출몰에 관한 것이니 마땅히 ‘묘당’에 보낼 사안이다. 1860년 청국이 영·불과 ‘북경조약’을 체결한 후 저들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선은 ‘예의의 나라’인 줄 알고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달라지고 있으니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①화친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 ②교역 허락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 ③도성을 버리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 셋을 적었다. 매우 강경한 논조의 지시다.
1866년 한 해에 독일인 오페르트 상선 출현(6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평양 군민과의 충돌(7월), 프랑스 해군의 양화진과 강화도 진입(8~10월) 등 ‘서양 오랑캐’ 출몰 건이 잇달았다. 누구도 대원군의 방침에 이견을 낼 수 없었다. 문제는 외침보다 내정이었다.
『고종실록』 1868년(고종 5) 2월 30일 자에 당백전 통용과 관련한 장문의 기록이 올라 있다. 대원군 정사의 두 번째 기록이다. 호조를 통해 내려진 ‘대원군 대감의 교시와 분부’이다. 앞서 관청에서 사전(私錢)을 한차례 허용한 이후 물가가 날개 달린 듯 뛰어올라 이를 다스리기 위해 호조가 서울과 지방에 공전(公錢)으로 당백전을 주조하여 보내니, 1냥 이하는 엽전을 쓰고 그 이상은 반드시 당백전을 쓰도록 하라. 그리고 8도와 4도호부에 암행어사를 1명씩 보내 실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하였다. 어사 12명의 명단도 실었다. 어사들이 가서 높고 낮은 백성들을 불러 모아 당백전을 영원히 쓴다는 것을 알리겠다고 하였다. 당백전 대책은 처음에는 물가 잡기였으나 곧 각종 공사 비용 마련을 위한 원납전 징수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이항로(1792~1868)와 최익현(1833~1907) 두 사람이 대원군 비판에 앞장섰다. 이들은 정통 주자학자로서 ‘서양 오랑캐’ 대응에서는 대원군과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관련 문제에는 날을 세웠다. 74세 고령의 이항로는 대왕대비 수렴청정 때 의정대신 조두순과 김병학이 차례로 추천하여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를 짧게 역임하였다. 그의 높은 학식이 어린 임금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천거였다. 1866년 9월 병인양요 중에 동부승지 이항로는 서양 오랑캐를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이유를 말한 다음,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이는 정사를 금해야 한다고 했다. 당백전 발행 두 달 전이었다. 대원군의 기세를 보고 미리 경계하는 진언이었다. 고종은 그의 의견을 중히 여겨 다음날 공조 참판의 직을 내렸다.
최익현, 왕의 결재 무시한 대원군 규탄
1868년 10월 10일 장령 최익현은 ①토목공사 중지 ②가혹한 세금 거두기 중지 ③당백전 혁파 ④문세(門稅) 받기 금지 등을 건의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2년 전 선생의 상소에 없던 내용은 그새 대원군이 시행한 것들이다. 고종은 나라 사랑, 임금 걱정의 진정이 어린 상소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토목은 중단할 수 없는 일이고 문세는 옛날에도 예가 있다고 답했다. 나흘 뒤 그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5년 뒤 1873년 6월 성균관 유생들이 대원군을 존대하여 대로(大老)로 부르기를 청했다. 넉 달 뒤 10월 임금은 최익현을 불러 동부승지로 삼았다. 그는 조정에 나오자마자 상소를 올렸다. 대원군이 ‘이륜두상(彝倫斁喪)’, 즉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규탄했다. 재상과 대신들도 이를 보고만 있다고 함께 규탄하여 대신을 비롯해 언관직의 사직 연명 상소가 6~7개나 뒤늦게 줄을 이었다. 반대로 최익현을 규탄하는 상소, 성균관 유생들이 대원군을 지지하는 권당 소동도 벌어졌다. ‘이륜두상’은 대원군이 매 정사에서 임금의 결재를 받지 않은 것을 지적함이다.
소동을 지켜보던 고종은 며칠 만에 직접 정치를 선언하여 ‘대원군 분부’는 끝이 났다. 경복궁 중건도 한 해전 9월에 끝나 영건도감도 이미 폐지되었다. 대원군은 대왕대비가 복원한 의정부-육조 중심 왕정 체제를 무시하다가 7년 만에 밀려난 것이다. 즉위 10년에 친정에 나선 고종, 어느새 20세가 된 그의 앞에는 파란만장한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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