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비현실, 하루키의 평행세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사랑하는 소녀가 은밀하게 고백한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나는 ‘가짜’라고. 그리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소녀가 말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있다.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는 것. 소년은 그림자를 버리고 도시에 들어가 애타게 그리던 소녀와 재회한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소년을 알아보지 못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다. 1부는 주인공이 10대 시절 여자친구를 떠올리며, 그녀가 말한 “사방이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2부에서 어른이 된 소년과 또 다른 소년 이야기로 바뀐다. 2부의 ‘나’(소년)는 45세의 중년 남성이다. 오래 몸담았던 출판 일을 그만두고 시골 마을에서 도서관 관장이 된 ‘나’는 매일 도서관에 오는 한 소년에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 소년 역시 그 도시에 가려고 한다. 어느 날 그 소년이 행방불명되면서 ‘나’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살아가는 생활에 종지부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나’의 마지막 선택은 3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책은 76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가독성이 좋다. 하루키 특유의 섬세한 감정 묘사도 여전하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시종일관 알쏭달쏭하게 묘사돼 궁금증을 남긴다. 그 벽이 왜 “불확실한 벽”인지 생각해보며 읽는 것을 추천한다.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현실과 비현실, 진실과 허구, 상실과 재생이다.
하루키가 2017년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이번 소설은 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발표했던 동명의 중편 소설이 토대가 됐다. 이 중편은 하루키가 유일하게 단행본으로 출간하지 않은 작품이다. 당시 하루키는 도쿄에서 재즈 카페를 운영했기 때문에 집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루키는 40년간 묻어둔 미완성 작품을 꺼내 장편으로 재탄생시켰다. 청년 하루키가 시작한 작품을 노년 하루키가 완성한 셈이다. 작품을 손보는 데는 3년이 꼬박 걸렸다.
30대에 시작한 소설을 일흔이 넘어 완성한 하루키는 후련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책의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 쓸 수 있어서(혹은 완성할 수 있어서) 솔직히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며 “나에게 이 작품은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불편한 존재였으므로. 그것은 역시 나에게(나라는 작가 그리고 나라는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생선 가시였다. 사십 년 만에 새로 고쳐 쓰며, 한 번 더 ‘그 도시’에 되돌아가 보고 그 사실을 새삼 통감했다”고 했다.
일본에서 현재까지 약 40만부가 팔렸고, 오리콘차트가 집계한 올해 상반기 일본 서적 판매 순위에서 1위에 올랐다. 한국에서도 이번 주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예스24 9월 1주차 종합 베스트셀러에 따르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예약판매 기간을 시작으로 2주 연속 1위를 유지했다. 예약판매가 흥행하며 출간 전 3쇄를 찍었고 현재 13만부를 제작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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