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그대에게
2023. 9. 9. 00:01
그대에게
박두규
강가를 걸으며 산마루에 떠오르는 초저녁달을 봅니다. 이 어두워진 저녁 산모롱이 어디쯤에 아직도 빛을 다 여의지 못한 동자꽃이나 물봉선 같은 꽃들이 남아 있겠지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빛에 이르지 못한 내 안의 깊은 어둠 속 꽃 한 송이를 떠올려 봅니다. 세상의 꿈이란 꿈 다 꾸어도 그 꽃 한 송이 이 강가에 살지 못하고, 오늘도 내 안의 어둠을 서성일 뿐입니다. 달빛 젖은 하늘에 별들이 촘촘해지면서 나는 아직도 이 어둠을 떠도는 다하지 못한 빛들의 쓸쓸함을 봅니다. 이제야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숲에 들다』 (애지 2008)
시간이 쌓여도 다함과 변함이 없는 말들이 있습니다. 사랑이나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말들이 그렇습니다. 이 말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발화되기 전 마음속에서 한참이나 빛나고 일렁인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또한 내뱉는다고 해서 빛이 사라지거나 일렁임이 잔잔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울러 말로 표현해내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마음을 온전히 그려낼 수도 없습니다. 온갖 어휘를 늘어놓고 비유와 예를 들어봐도 근원에 닿지 못하며 하면 할수록 멀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잘 살펴야 합니다. 결국 사람에게 닿는 것은 별이 아닌 별빛이고 깊은 바닷물이 아닌 파도의 포말인 까닭입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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