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이웃의 도움으로

2023. 9. 8. 22:4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풍자와 농담에 엄중한 시대상 담아
뜻밖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다면

얀 네루다, ‘그걸 어떻게 하지?’(‘프라하’에 수록, 이정인 옮김, 행복한책읽기)

아침저녁으로 식당에서 만나도 데면데면했던 체코 작가 야로슬라프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역시 소설 때문이었다. 베를린 ‘작가의 성’에 체류하고 있을 때였다. 카프카를 제외하고, 알거나 읽어본 적이 있는 체코 작가가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내가 젊은 작가로서 얀 네루다와 이반 클리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으니까. 그리고 체코 문학의 장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는 그 거장들이 정치적 상황과 맞서 싸우면서도 시대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들을 써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도. 이런 대화를 나눈 지 10년도 넘었지만,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다시 한다면 아직은 같은 대답을 할 듯싶다.
조경란 소설가
체코의 국민작가라 불리는 얀 네루다는 프라하의 상징물 카를 다리 왼쪽의 ‘작은 지역’이라는 뜻인 ‘말라스트라나’라는 동네에서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그 지역에서 살았다. 1886년에 얀 네루다는 한 일간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게 되는데 작가가 화자인 그 작품의 공간 역시 말라스트라나 거리이며 제목은 ‘이걸 어떻게 하지?’이다. 엄격한 시대에 풍자와 농담 속에 주제를 숨긴, 그런 단편들이 가끔 읽고 싶을 때가 있다.

화자는 산책길에서 “보통 때라면 거기서 볼 수 없는 사람들과 물건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눈여겨”보곤 했다. 이를테면 어느 집 앞에 놓인 낡은 주전자나 우유통, 대로 한복판에 있는 빵 굽는 쟁반 등. 저 물건들을 누가 왜 저 자리에 놓고 갔을까? 화자는 궁금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프라하에 콜레라가 퍼지면서 시 당국은 집을 깨끗하게 유지해 공기가 오염되지 않도록 예방하라는 포고문을 곳곳에 붙인다. 하녀 안차가 집을 늘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지만 화자는 문득 매트리스 속을 채운 지푸라기를 갈아 넣은 지 무척 오래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새 지푸라기를 사 온 안차가 매트리스 속을 갈아 넣다가 화자에게 묻는다. “헌 지푸라기는 어떡하죠?”

화자는 안차에게 쓰레기 구덩이가 있는 큰 집을 찾아가 돈을 주고 지푸라기를 묻어달라고 시킨다. 안차는 나갔다 와선 구덩이는 이미 꽉 차 있고 그걸 치우는 농부는 겨울까지 바쁘다고 전한다. 이제 두 번째 시도. 쓰레기 치우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로 한다. 쓰레기 치우는 사람은 “그건 엄하게 금지되어” 있다고 거절한다. 세 번째 방법, 네 번째 방법도 실패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지푸라기가 큰 고민거리가 돼 버렸다. 화자와 안차는 방법을 궁리하다 종이로 작은 고깔을 만든다. 거기다 지푸라기를 담고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산책하는 척하면서 지푸라기를 뿌리려고. 몇 번 해보니 그렇게 하다간 지푸라기를 없애는 데 반년도 더 걸릴 듯했다. 창피하기도 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책도 일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 단편소설에서는 하녀 안차의 역할이 빛난다. 어느 날 안차가 뛰어들어와 화자에게 말한다. 헌 지푸라기들을 처리할 방법을 찾았다고. 안차와 화자는 매트리스를 끌고 이웃의 우유 아주머니네로 끌고 갔다. 우유 아주머니 집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려나 이웃의 도움으로 화자는 이제 두 발 뻗고 새로 속을 채워 넣은 매트리스에서 푹 잘 수 있게 되었다. 시기적절한 이야기에 대해 고민했던 얀 네루다의 실제 이야기. 얀 네루다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한 작가는 칠레의 유명한 저항 시인 파블로 네루다이다.

며칠 전에 공기청정기 필터를 갈고 나니 크기도 꽤 되는 원통형의 헌 필터가 남았다. 이걸 어떻게 버려야 하지? 고민하다 산책하러 나갔다. 언제부터인가 가로수 밑이나 골목 담벼락 아래에 버려진 의자들, 여행용 트렁크, 전기밥통 같은 물건들을 보게 되었다. 울면서 혼자 걸어가는 사람들도 자주 본다. 보통 때라면 거기서 볼 수 없는 물건들과 사람들.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계속 따라다닌다. 시기적절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어떤 방식으로 이웃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자주 생각하려고 한다. 곤란하고 난처한 일들을 해결하거나 넘길 수 있었던 건 뜻밖에 옆 사람들 덕분이기도 할 테니까.

조경란 소설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