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2023. 9. 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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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직업 얻는 수단이 되며
서서히 공교육의 가치 무너져
선생님들마저 단순 직장인 취급
땡볕 아래 거리로 나올 수밖에…

오래전,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에는 그조차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당연히 등록금을 내야 했고, 육성회비라는 것도 있었다. 학교에 가면 칠판 왼쪽이나 오른쪽 귀퉁이에 미납자 명단이 적혀 있었다. 미납자들은 수업하는 내내 가난의 증표처럼 칠판에 새겨진 자기 이름을 맞닥뜨려야 했다. 교무부장이나 교장은 수시로 각 반의 수금(?) 상황을 점검했고, 윗사람에게 욕을 먹고도 등록금 빨리 내라고 독촉만 하는 선생은 천사와도 같았다. 어떤 선생은 미납자를 일일이 호명해 수업시간 내내 교실 뒤에 세워두기도 했다. 심지어 돈 가져오라며 집으로 쫓아낸 선생도 있었다. 집으로 간 아이 중 누구도 등록금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못 했겠지. 누가 집에 돈을 쌓아놓고 자기 자식 자존심 상하게 했겠나.

나는 가난했지만 다행히 부모의 교육열이 높아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등록금만은 제때 주었고, 해서 이름이 불리는 일도, 뒤에 서는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의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부반장 엄마가 예의 없이 학교도 한 번 찾아오지 않는다고 아이들 앞에서 내 뺨을 후려갈긴 선생도 있었다. 고작 열 살 남짓이었지만 그 말이 왜 돈을 가져오지 않느냐는 의미라는 것쯤은 나도 눈치로 알았다. 우리 모두 그 정도는 알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교실을 나설 때면 내 심장이 다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학교를 나선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느 다리 밑, 혹은 어느 야산의 소나무 밑에서 더러운 세상과 더러운 어른을 삐비꽃 씹듯 씹지 않았을까? 그 아이들이 제발 무탈하게 자라났기를….
정지아 소설가
그때 교사들에게는 무소불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권력과 권위가 있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고집이 세다는 이유로, 공부를 안 한다는 이유로, 치마를 짧게 줄였다는 이유로, 어지간한 선생들은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교사 밑에서 아이들은 억하심정을 품고 성장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교사에게 역으로 갑질을 서슴지 않는 부모가 되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 시절, 못된 교사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참 스승도 있었다. 박봉을 털어 제자의 등록금을 대신 내주는 선생도 있었고, 엇나가는 아이를 기어코 붙잡아 세운 선생도 있었으며, 나 같은 빨갱이의 자식에게 방 한 칸을 공짜로 내주겠다는 선생도 있었다. 내 고3 담임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한 친구의 등록금을 대신 내줬을 뿐만 아니라 공부 잘하는 애들보다 네가 훨씬 대단하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런 선생들이 있어 부모들은 선생을 하늘같이 여겼다. 선생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다. 가난해서 과외도 학원도 보낼 수 없었던 대부분의 부모에게 선생이란 못 배운 자신을 대신해 아이들을 사람 되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존재였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너무 잘났다. 돈도 많아서 과외며 학원이며 맘대로 보낸다. 그러다 보니 교사를 일타강사보다 실력 없는, 돈도 못 버는, 그저 그런 직장인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

무엇이 공교육의 붕괴를 불러왔는지 우리 모두 알고는 있다.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돈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돈만 많으면 불의도 불법도 개의치 않는다. 이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친일을 해서 부자가 된 친일파들이 해방 뒤에도 청산되지 않았고, 군부독재에 빌붙어 제 잇속을 챙긴 사람들 또한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의를 버린 대가로 그 후손들까지 잘 먹고 잘사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의를 지키며 살겠는가? 돈이 지상 최고의 가치일 뿐이다. 정의를 지키고 불우한 친구나 이웃을 저버리지 못해 가난한 사람을 예전에는 좋은 사람을 넘어 ‘된사람’이라고 했다. 요즘은 바보라고 한다. 나만 부자로 호의호식하면 장땡이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가 아닌 이상 부자가 되려면 좋은 대학, 잘나가는 학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부터 학교가 진학의 수단, 결과적으로 돈 잘 버는 직업을 갖게 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이유다. 가장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교사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오늘의 현실이 참으로 쓰라리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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