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고통의 전문가인가[안주연의 래빗홀]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
아서 클라인먼 지음·이애리 옮김
사이 | 476쪽 | 24000원
“진료를 하며 사람들의 우울과 불안을 듣고 공감하는 일은 지치지 않나요?”
직업을 알게 된 분들은 걱정스레 이런 질문을 건네오곤 합니다. 대강 얼버무리곤 했던 대답을, 이 기회에 차분히 적어봅니다.
“책임도 많이 느껴지고, 내담자에게 일어난 비극과 고통에 영향을 받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힘든 일이지요. 그런데 고통과 상실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삶을 뒤덮기도 합니다.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내담자와 함께하는 최선의 방법일 때도 많습니다. 고통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화 참여자들에게 삶 자체에 관한 중요한 것들을 느끼게 해주기도 합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정말 함께한다고 느껴지고, 때로는 깊은 충만감을 느낍니다.”
질병과 고통은 누구나 겪게 되지만 자신만의 삶의 맥락과 자기 몸이라는 한계 내에서 겪어내기에 누구와도 완전히는 공유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질병이란 근본적으로 외롭고 실존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의 고통이라 해도 똑같이 느낄 수도, 대신 겪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개체를 구분짓는 감각과 운명의 벽을 넘어, 아파하는 사람을 혼자 두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의학과 인접기술, 사회보험, 복지제도가 그렇게 발전해왔지요. 하지만 질병과 함께하는 삶의 무게와 의미는 제도와 기술, 시스템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의료인류학, 사회의학을 연구해온 아서 클라인먼의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는 질병 앞에서의 이런 막막함을 다룰 이해의 틀을 제공해주는 책입니다. 90세가 넘은 노학자인 그는 의대시절부터 질병 경험을 개인적으로도 중요하고 사회적 맥락과도 관련 있게 만드는 이야기들에 의학이 체계적으로 관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는 개인이 앓는 질병의 궤적과 그 안에서 그만의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질병 서사’가 우리에게 삶의 문제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통제되며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가르쳐준다고 씁니다. “질병을 앓는 환자를 치료하려면 의사는 환자가 어떤 사람인지, 환자를 둘러싼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역 사회는 어떤지, 그리고 의사와 그의 임상 세계관이 환자의 진단, 예후, 치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상적인 얘기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시간과 자원의 한계로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못하는 환자와 치료진도 어떤 질환의 배경과 진행에는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음만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임상의사로서의 경험에서 자연과학적 의학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던 부분을 인류학자로서의 관찰로 채워 독특하고 깊이 있는 설명틀을 완성하였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질병(illness)과 질환(disease)을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질환은 환자의 신체 기능장애나 생물학적 변화만을 일컬으며, 신체를 생물의학이라는 특정한 관점에서만 관찰하여 붙이는 정의라고 규정합니다. 반면 질병은 질환과 함께 살아나가는 경험이나 환자와 그 가족, 더 넓게는 사회가 환자의 증상과 장애를 어떻게 인지하며, 어떻게 이에 대응하며 살아가는지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클라인먼은 의료인과 환자, 주변인들이 아픔과 고통을 질병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이해하고 경험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생물의학적 관점만으로는 일종의 치료실패를 뜻하는 만성질환자를 돌볼 때 환자의 질병 경험을 인정하는 것, 즉 환자의 경험에 권위를 부여하고 공감하며 듣는 행위가 가장 중요하며, 이 자체가 큰 치료적 의미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저는 환자들의 정서적 어려움을 생물·심리·사회학적 모델로 설명할 때가 많은데요, 진료경력이 길어질수록 환자들의 질병 서사가 사회적 맥락에 기반하여 구성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한국처럼 100년 내에 식민지·전쟁·독재를 경험하고, 유교적 농경문화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빠르게 이행하며 세대 간 문화적 격차가 큰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서적 피로와 소통의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의존과 친밀감을 경험하기 어렵고, 이러한 고립은 당사자의 신체적, 정서적 건강을 크게 해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다양성도 커지다 보니, 가치관과 문화적 배경이 큰 의미를 가지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내에서 환자와 의사, 그리고 보호자가 각기 다른 맥락과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상황도 종종 마주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클라인먼이 이야기하는 질병과 삶에 대한 전인적 이해와 통합적인 질병 접근은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삶과 고통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한 겸손하고 끈질긴 학자의 기념비적 저작이기에 부분이나마 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통과 그 겪어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읽어보시기를 권하며, 작가의 다른 책 <케어>의 한 구절로 끝을 대신합니다.
“나는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경험하면서 돌봄의 의미를 탐험하길 바랐고 그들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유용한 삶의 지혜를 찾기를 바랐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함께 위기를 공유하고 이 모든 과정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함께 기억의 파편을 꺼내보고 인생의 비탄을 받아들였다. 그것이야말로 치유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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