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나라 밖에 내 편 네 편 따로 있으랴
강중회담 결렬로 바빠진 조선
조정 대신들구경꾼으로 전락
왜적에게 연전연패한 이유
소서행장은 간교한 인물이었다. 그의 간교함은 선조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쉽게 엿볼 수 있다. 겉으론 조선을 배려하는 듯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국제관계에선 선의善意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이권에 따라 내 편 네 편이 갈릴 뿐이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은 평조신으로 여러번 한양에 와서 가선대부(종2품 하下의 품계)까지 봉직했던 터라 조선 사람을 속여 먹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을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우리 군대가 만리풍파의 어려움과 관산(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변방)의 험함을 가벼이 여기고 바로 한양으로 들어갔거늘 지금 까닭 없이 강화를 하고자 하니 귀국이 믿지 않는 것은 마땅합니다. 신이 귀국을 위하여 그것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길을 빌려 대명을 치고자 함에 비록 모든 장수들이 명령을 받들어 여기까지 왔지만 이로부터 또한 수천리를 지나야 명에 들어가니 먼저 귀국과 화친을 이루고 그다음 귀국의 한 말씀을 빌려 대명에 화의를 청하려 합니다. 귀국이 대명으로 하여금 일본 측에 화의를 청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3국이 모두 평안하리니 이보다 더 좋은 방책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장수들은 노역을 면하고 만백성은 소생하리니 이는 우리 장수들의 의견입니다. 우리 전하도 귀국과 절교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국이 이웃나라와의 국교의 도리를 잃어 우리 군사를 막는다면 우리 또한 군대를 움직일 것입니다. 신이 귀국의 높은 직위를 허심탄회하게 받았으니 어찌 높고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소서행장이 보낸 서신 내용이다. 평양성의 선조 일행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은 뻔한 일. 대답이 없자 소서행장은 다시 서신을 보냈다.
"다시 드립니다. 전날 글을 올려 화해하자는 일을 말씀드렸는데 귀국이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라의 명을 받들어 장수들의 앞장을 서게 됨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솔직한 심정을 다하여 누누이 말하오니 족하(이덕형)께서는 이를 살피소서. 아직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또한 괜찮으니 이 편지의 내용을 전해주십시오. 불선합니다. 조선국 예조판서 이덕형 각하."
류성룡은 왜군이 무엇을 주장하든 적의 공격을 하루라도 미루고자 했다. 명나라에서 구원병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성과 공략을 위한 치열한 신경전 끝에 류성룡은 이덕형을 배에 태워 보내 소서행장 측과 만나도록 했다. 이른바 '강중江中회담'이었다.
소서행장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두 나라가 무기로 대적한 것은 불행한 일이오. 왜국의 본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중국에 조공하려는 것밖에 없는데 귀국이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일이 여기까지 이른 것이오. 지금이라도 귀국이 중원에 조공할 길만 빌려준다면 양국이 무사할 것이오."
이덕형이 답했다. "대명황제에게 조공을 청하려면 공손히 할 길이 있을 터인데 왜 명분 없는 군대를 끌고 나와 이웃나라를 침범하오? 만일에 성심으로 대명에 조공할 길을 열기 원하거든 곧 퇴병하고 다시 오시오."
소서행장 측은 "귀국에서 일본의 청을 들어 중원에 가는 길을 빌려준다면 곧 군을 거두겠으나 그 허락을 받기 전에는 군사를 거둘 수 없소"라고 했다. 사실 '강중회담'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타협점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소서행장 측은 흥분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왜국의 30만 대군이 뒤를 이어 쳐들어오고 또 10만여의 수군이 조선 서해에서 평안도로 올 것이오. 그리 되는 날이면 용서가 없을 것이오. 조선 국왕을 사로잡아 항서를 쓰게 하는 자리에서 대감도 다시 만납시다!"
이덕형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이제 며칠이 지나면 명나라 병사 100만이 육로를 통해 올 터이고 또 수군명장 이순신이 경상도 해안에서 10만이라 칭하는 일본수군을 연전연승하여 섬멸하였거든 귀하는 후회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이렇게 양국의 강중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1592년 6월 9일의 일이다.
대동강의 강중회담이 결렬된 직후 이덕형은 중국으로 떠났다. 하루빨리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북경에 들어간 이덕형은 명나라 황제에게 6차례나 구원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때쯤 청병사請兵使 정곤수도 명나라에 들어와 조선이 위태롭다는 사정을 알렸다.
왜적 수천명이 대동강 동쪽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위세를 보이자 선조는 6월 10일 왕비 일행을 먼저 함흥으로 출발시켰다. 일부 군민軍民이 무리를 지어 길을 막고 떠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청했다. 난동이 폭동 수준으로 변할 뻔했지만 황해도 관찰사 송언신이 백성 몇몇을 참수하고서야 겨우 난동이 진압됐다. 이날 승정원에서는 임금이 평양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문을 올렸지만 선조는 "적의 예봉을 피해야 한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다음날인 6월 11일 선조는 영의정 최흥원, 우의정 유홍, 전임대신 정철의 무리를 거느리고 소리 없이 칠성문을 빠져나갔다. 왕비 일행은 함흥 쪽으로 길을 떠났다.
선조는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전임 이조판서 이원익 등에게 평양성을 지키게 했다. 영의정에서 파직됐다가 풍원부원군으로 다시 등용된 류성룡에게는 평양에서 명나라 구원군을 맞이하라고 지시했다. 수성대장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풍원부원군 류성룡,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구경꾼들과 다름없었다. 군사들을 통솔하는 원수, 대장 등으로 임명됐지만 기실은 풍월구나 글줄이나 짓는 선비에 불과했다. 무관에게는 병권을 주기 싫었던지 체찰사니 도원수니 하는 요직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요직을 맡은 인물들은 말달리기와 활쏘기가 무엇인지, 검술과 창법이 무엇인지, 기습과 정공이 무엇인지, 도대체 전투가 무엇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조선이 왜적에게 연전연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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