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미래] 한국적 창조성의 핵심
크리스털 앤더슨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의 '케이팝은 흑인음악이다'(눌민 펴냄)는 독특한 책이다. 이 책은 서태지부터 시작해 방탄소년단에 이르는 케이팝의 전개 과정을 소울, R&B, 힙합 등 흑인음악과 연관지어 다룬다. 케이팝은 흑인음악의 정신, 보컬 스타일, 기악 구성, 공연 미학을 바탕으로 발전했고, 흑인 공동체의 호응을 받아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케이팝은 일본에서 배운 아이돌 육성 시스템, 대중음악의 혁신을 주도해 온 흑인음악, 하우스 뮤직 등 대중음악의 첨단 흐름에 대한 재빠른 수용성이 결합한 결과다. 존 리 미국 버클리대 교수는 이를 문화적 기억상실이라고 비판한다. 급속한 서구화의 결과, 한국인이 고유문화를 망각하고 서양 음악을 자기 음악인 것처럼 재창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런데 케이팝의 성공은 한국문화의 고유한 전통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장지연 대전대 교수는 우리 문화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선진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담긴 보편 정신을 적극적으로 파악한 후, 이를 바탕 삼아 우리만의 독특한 산물을 이룩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한다.
해외 선진 문물에 대한 배타성은 문화적 후진성의 증거다. 우리 조상들은 인류 문명의 정수를 담은 중국 문화의 보편적 성취를 배우고 익히는 걸 꺼리지 않았다. 송 자기를 수용해 고려청자를 생산했고, 인쇄문화를 받아들여 금속활자를 만들었고, 증류 기술을 배워 소주를 제조했다. 임란 이전까지 셋 모두 일본은 수입만 할 뿐 직접 생산하진 못했다.
문명 정수를 배워서 우리 힘으로 재현하는 건 우리 문화의 특성이었다. 핵심을 꿰뚫어 우리화하지 못하면, 주변의 숱한 민족처럼 중국 문명의 구심적 매력에 홀려버릴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 문명을 수용하되, 어떤 것도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세종은 말했다. "우리 예악 문물이 중국에 견주게 되었으나, 풍토가 다르고 소리가 다르기에 글자가 맞지 않아 불편했다."
우리는 중국 문명을 가장 높은 수준(예악)에서 신속하게 받아들여 우리 문화의 수준을 높이되, 이를 우리 현실(풍토)에 맞추어 고쳐 쓰는 걸 반복했다. 비슷하되 다르게 만들기는 한국문화 특유의 역동적 창조성의 핵심 자질이다. 근대 이후 우리의 성취인 반도체도, 조선도, 자동차도, 케이팝도 모두 타자의 정수를 빠르게 배우고 익혀서 우리 문화로 바꿀 줄 아는 오랜 정신 전통, 즉 원융성의 결과였다. 현재 위기에 처한 한국의 미래도 아마 여기에서 그 활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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