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래잡기] 예술은 다양할수록 좋다
키아프·프리즈 서울
선택의 폭 많은 것은
에너지 소진시키지만
다채로운 작품 보는 건
미술애호가에겐 축복
20년 전쯤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가 '선택의 패러독스'에 관한 연구를 선보였다. 풍요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매일 뭘 입을지, 점심은 뭘 먹을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빠른 판단을 하느라 에너지를 소진한다. 슈워츠는 선택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한하여 삶에서 중요한 것에만 집중할 것을 제안하는데, 최고의 선택을 못해도 괜찮으니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는 법을 익히면 삶이 훨씬 만족스러워진다는 논리이다.
원래는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더 행복하다는 단순 명제가 현대의 과다 소비 사회에서는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점에 공감하지만,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슈워츠의 논리를 대입시킬 수 없다. 예술은 그 다양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슈워츠의 논리대로라면 '꼭 필요한 선택을 선택'하는 경우, 바로 그 피곤해도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예술을 대할 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미술계 최대 행사가 열린 주의 끝자락이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키아프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프리즈 아트 페어가 작년부터 함께하는 9월 초다. 아트 페어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갤러리들이 중개하는 전 세계의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니 열심히 구경을 다녔다.
아트 페어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와 달리 작은 공간에 수없이 많은 작품이 걸려 눈을 매혹시키고, 수많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느라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눈도 다리도 심지어 머리까지 아파온다. 그래도 대형 미술 전시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늘날의 아트 페어가 심신의 스트레스를 참으면서도 봐줘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감사할 수 있다.
대규모 미술 전시의 원류를 따라 올라가면 17세기 프랑스에서 루이 14세의 후원하에 엄선된 아카데미 회원들의 작품이 루브르궁의 거대한 방 하나에서 전시된 살롱이 있다. 초기의 살롱 전시는 국립 미술 학교의 교수와 졸업생들의 작품을 보여주면서 시작했지만, 18세기부터는 점차 참여 작가의 범위를 늘려갔고, 대중의 문화적 소양을 고양시키고자 했던 계몽주의 시대의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사립 갤러리가 거의 없던 시대라 미술가들의 살롱 참여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귀한 전시 기회였다.
1880년 살롱 전시의 모습을 그린 에두아르 당탕의 작품을 보면 남녀노소 좋은 작품을 실컷 구경하는 옛날 사람들이나 오늘날이나 비슷한 분위기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아직 여성들의 대외 활동에 제약이 많던 시대에 살롱은 여성이 손가락질 받지 않고 밖에 나와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살롱의 형식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져서 1922년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시작해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런 관(官) 주도의 대규모 전시는 극소수의 명망 있는 미술계 원로들이 출품 가능작을 심사하는 폐해가 있었다. 결국 보수적인 방식에 부합하는 점잖은 작품만이 선보였고, 학연과 지연이 강조되었으며, 좀 삐딱한 혁신을 시도한 미술가의 작품은 출품이 거부되어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안타까운 현실이 있었다.
오늘날의 아트 페어도 상업성이라는 기준이 작용할 수밖에 없고, 여전히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선보이도록 하는 심사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그 기준이 오히려 보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을 많이 소개하도록 유도하는 쪽이다. 페어에서 비슷한 작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미술 애호가에게는 축복이다. 미술 작품 하나하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눈 호강을 하면서 머리로는 끊임없는 사색을 해야 하는 상황. 나는 이 작품을 더 좋아하는가, 그 옆의 작품에 더 끌리는가. 선택을 하려면 머리가 복잡해지지만 그조차도 행복한 스트레스가 되는 경험이 미술과의 조우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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