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어느 정치 검사가 후배들에게 남기고 간 유산

김지환 기자 2023. 9. 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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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은 가는데, 도무지 조사할 방법이 없다.” 7일 점심에 만난 한 평검사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A씨라는 남성이 여성들이 혼자 사는 반지하 방을 훔쳐보다 뒤늦게 적발된 사건을 검토하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건 피의자인 A씨가 비슷한 종류의 범행을 저지른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 때문에 A씨는 징역 8개월 실형까지 살다 나왔지만, 이번에 또 붙잡혔다. 하지만 검찰이 A씨에게 적용할 수 있는 혐의는 주거침입뿐이다. A씨가 여성 혼자 사는 빈집에 몰래 들어갔던 사실이 현장에서 발각된 게 아니라 CCTV를 통해 뒤늦게 발견된 데다, 검찰에 송치된 혐의는 주거침입이라 정황상 증거만으로는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검사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등 이용촬영) 여지가 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평검사가 고민을 곱씹던 그날 오후, 검찰 내 고위직을 지낸 30년차 현직 고위 검사가 대놓고 ‘정치 발언’을 쏟아냈다. 장소는 조국 전 장관의 저서 ‘디케의 눈물’ 북콘서트였다. 이 검사는 자신이 공소유지를 지휘했던 사건의 피고인인 조 전 장관을 찬양하면서 조 전 장관이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식의 언급을 했다. 1심에서 유죄를 받았던 조 전 장관을 향해 “제가 모신 분” “강철 같으신 분”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행사의 사회를 본 사람은 이 고위 검사가 기소를 지휘해 1심에서 벌금형이 선고된 최강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이러한 발언을 한 검사는 지난 정부에서 서울중앙지검장, 법무부 검찰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정권 소방수’라고 불린 한편, ‘정치 검사’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던 이성윤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 연구위원이 행사장에서 한 발언에 대해 “드디어 본인 성향을 커밍아웃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한 부장검사는 “저렇게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과거 서울중앙지검장 재직 시절 본인의 정치적 성향대로 업무를 처리했다는 뜻 아니겠냐”며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이 검사의 행동은 ‘자신이 취급하거나 취급하게 된 사건관계인을 사적으로 만나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검찰 공무원 행동강령에도 어긋난다. 법무부는 현재 이 연구위원에 대한 징계를 검토 중이다.

또 다른 부장검사는 이 연구위원의 행동에 대해 “(전 정권의) 검찰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정권 방탄’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이 연구위원은 조 전 장관 행사에서도 검찰 개혁을 언급하며 “만약 검찰 개혁이 성공했다면 오늘 같은 무도한 검찰 정권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연구위원이 말한 개혁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2022년 검수완박 입법이 진행됐을 때 인권변호인들과 검찰은 모두 “법안이 통과되면 힘 없는 사람들이 입을 피해만 늘어난다”고 입을 모았다. 각각의 입장이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려도 전 정권이 끝까지 밀어 붙였던 개혁. 그 개혁의 결과 가시적인 성과는 사라지고, 사건 적체 등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다시 법이 개정되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개혁은 성과에 비해 피해가 두드러졌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러한 개혁의 결과, 기자가 점심 때 만난 평검사의 고민 역시 늘었다. 그는 “검찰이 성범죄 사건을 인지할 수 없게 돼 정말 안타깝다”며 한숨을 쉬었다. 피의자 A씨의 혐의가 단순 주거침입이고, 사건 발생 몇일 뒤 붙잡힌 터라 압수영장을 발부받기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평검사는 더 이상 사건을 수사할 권한이 없었다. 이렇게 된 것도 이 연구위원이 선봉에 섰던 ‘개혁’에 책임이 있다. 그 개혁의 일환이었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등으로 인해 성범죄 사건의 경우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사건만 다룰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 연구위원은 2021년 6월 서울중앙지검장을 물러나며 “선배들로부터 배웠던 것처럼 ‘검사는 수사로만 말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이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이 연구위원의 말처럼 지금도 현장에선 많은 검사들이 ‘수사로만 말한다’는 원칙대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런 검사들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추종하느라 수사 기관의 손발을 묶어버린 선배들 때문에 짊어지지 않아도 될 무거진 짐을 짊어져야 한다. 누구나 각자의 정치적 신념을 지킬 자유는 있지만, 적어도 이 연구위원처럼 검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훗날 후배 검사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보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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