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에 듣는 황병기 ‘치유의 음악’...美 평론 “초스피드 시대 해독제”
“전통을 틀 안에다 가두지 말고 동시대적인 예술로 만들어야 한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1936년~2018년)가 남긴 위 한 마디는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일 것이다. 국내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로 꼽히는 그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실험과 파격의 미학이 가득 찬 곡들을 남겼다. 서울대 법과대학 3학년 재학 중이던 1957년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탔을 만큼 황 명인에게 본디 가야금은 쉼을 함께 하는 친구와도 같았다. 그만큼 그의 곡에는 곳곳에 자유로움이 스며 있었고, 때로는 세대를 가리지 않는 친근함으로 젊은 세대의 귀를 두드렸다. 그가 자주 즐겨 쓴 첼로 활 연주 기법으로 녹음한 가야금 연주곡 ‘미궁’은 게임 ‘화이트데이(2001년)’의 배경 음악으로 쓰였고, 2010년대 중반까지 전국 학생들의 기억 속 강렬한 음률을 남겼다.
이토록 한국 음악의 새 지평을 넓혀온 황병기 명인의 곡들이 후배들의 손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다. 박현숙, 김일륜 등 황 명인 생전에 함께 연주 활동을 해왔던 황병기작품보존회 회원들이 오는 10일(일) 국립국악원 우면당 ‘황병기 가야금 작품세계4′ 무대에서 황 명인의 시대별 대표작들을 공연한다. 황병기작품보존회는 황 명인의 작품 세계를 동시대의 음악으로 연주하고, 꾸준히 보존 계승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그의 음악 중 다양한 실내악곡을 모아 한 무대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려왔다.
황병기 명인의 서거 5주년을 맞은 올해 무대에선 특히 ‘연주’ 뿐 아니라 ‘선곡’ 또한 중요한 주제이다. 가야금을 중심으로 작곡한 황 명인의 성악과 관악협연곡들 중에서도 특별히 의미를 지닌 곡들을 골라냈다. ‘창작국악’이란 장르 자체가 생소하던 1976년 황 명인이 박목월 시인의 향토색 짙은 동명 시에 성악곡을 붙인 ‘고향의 달’이 대표적 예. 강원도 민요풍을 자아내면서도 정악 구조를 충실하게 짜 낸 곡의 기틀을 이번 무대에서도 집중적으로 재현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1977년 황 명인이 송강 정철의 가사 ‘성산별곡’ 속 산의 운치를 주제로 한 가야금과 대금의 이중주곡 ‘산운’, 연날리기, 행진, 제기차기, 귀가 등 어린이들의 놀이를 주제로 짠 4악장 짜리 무용음악을 가야금과 대금으로 연주한 ‘아이보개’, 차를 주제로 한 시에 곡을 붙인 ‘차향이제’, 서정주의 시에 성악과 가야금 이중주 선율을 붙인 ‘추천사’ 등을 선보인다.
황병기작품보존회 측은 “황 명인의 음악은 한국적인 섬세함을 지니면서도 세계 청중에게 크게 어필한,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의 대표적 예였다. 미국 음반 비평지 ‘스테레오 리뷰(Stereo Review)’는 그의 음악에 ‘초스피드 시대의 세계에 해독제로서 특별히 가치 있는 음악’이란 평을 남겼다”며 “이번 공연은 ‘재미나 오락보단 정화 기능의 음악’을 추구한 황 선생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쓰다듬고 치유해볼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공연문의 02)583-4300, 전석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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